양반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술이 넘치고 노래가 넘친다. 잔치자리에는 기생에게 줄 화대가 가득하다. 양반들 모임에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말석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모두 웃음꽃이 피는데, 말석에 앉은 남자는 말이 없다. 그는 그저 술을 마시고, 떡과 고기를 먹을 뿐이다.
잔치가 끝날 무렵 이 초라한 행색의 남자는 옆 사람에게 패도(佩刀-칼)를 좀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칼을 받아든 그는 좌중 앞으로 나오더니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소인은 거지입니다. 일생을 굶주리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함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이제 다행이 여러 어르신의 덕으로 아름다운 자리와 좋은 음식에다 좋은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이런 즐거움은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은 또다시 굶주릴 것이니 죽으려 한들 제대로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어르신께서 칼을 내려주셨으니 감히 죽어서 어르신들께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
좌중이 놀라 말리며 돕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움큼씩 은전을 던져주었다. 은전이 수북히 쌓였으니 걸객은 받을 수 없다며 칼로 제 목을 찌르려 했다. 이제 기생들까지 나서서 화대로 받은 돈과 재물을 내놓았다. 걸객은 '어르신들께서 제가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소인도 굳이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누더기 옷을 입은 제가 진기한 재물을 지고 문을 나서면 도둑으로 몰려 죽을 것인즉, 이래나 저래나 죽을 것, 여기서 죽겠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걸객은 양반들이 붙여준 종의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대문을 빠져나갔다.
영조와 정조를 섬긴 규장각 교리 성대중(1732~1809)이 쓴 '청성잡기'에 나오는 '단수 높은 도둑' 이야기다.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관직에 올랐다. 정조 때 당시 유행하던 자유분방한 '패관소품' 문체를 비판하고 고문회복을 주장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고, 문체반정을 강력하게 주도했던 정조로부터 순정한 문장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정조의 문체반정이란 시시껄렁한 시정의 문체를 버리고 옛글의 진중한 태도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서얼이었던 성대중은 정조의 입맛에 맞춰 시시껄렁한 문체를 비판하고, 옛글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낮에 이처럼 품행이 방정하고 생각이 순정한 척 했던 성대중이 밤에는 태도를 싹 바꿨다.
성대중은 궁궐을 나서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온갖 해괴한 이야기를 모았다. 갖가지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순정한 어법을 버리고 패관소품 문체로 '청성잡기'를 쓴 것이다.
청성잡기에는 해학과 슬픔, 우정과 의리, 배신과 음모 등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은 아버지의 글을 모아 '청성집'을 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았다. 순정한 문체를 표방했던 아버지 성대중의 이름에 누가 될까 염려해서였다. '잡기'는 필사본 한 본이 남아 전해지다가 1964년 '도서'에 소개되면서 학계에 알려졌다. 이 책 '궁궐 밖의 역사'는 '국역 청성잡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관한 내용만 간추려 엮은 것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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