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의 빈 뜰에 선 키 큰 벚나무에 기대어 앉았노라면 갑자기 그 큰 덩치를 지탱하고 있는 땅 속의 뿌리가 궁금해진다. 무슨 마음으로 자신은 드러내지도 않은 채 수십, 수백 년을 한결같이 잎새와 가지를 받드는 것일까. 어쩌면 저리도 변함없이 꽃의 화려함을 시샘하지 않고, 열매의 풍요함을 탐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하루같이 깊어질 수 있을까.
나무의 뿌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굵기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뿌리를 감싸고 있는 토양은 얼마나 비옥한지, 물기는 적당한지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무줄기나 잎의 상태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줄기가 힘차게 뻗어있고 잎이 무성하면 뿌리의 상태가 건강한 경우다. 꽃이 곱고 향기롭거나 열매가 튼실하면 아주 건강한 상태이고 그렇지 못하면 뿌리가 병약하거나 토양의 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상태이다. 어느 경우든지 나무의 모습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에게도 뿌리는 있다. 정신이 곧 그것이다. 나무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신에도 굵기가 있고 깊이가 있다. 정신을 감싸고 있는 시간적·공간적 환경이 있다. 얼른 보아서는 얼마나 건강한지, 사회성은 어떠한지 알기가 힘든다. 오히려 자기 보호만이 목적인 나무의 뿌리에 비해 위장과 속임수로 남을 해코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분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 실체는 금방 드러난다. 산같이 바다같이 언제나 언행이 일정한 사람은 정신 또한 건강한 경우일 것이고,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꾸는 사람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정신의 경우 나무의 뿌리와는 달리 비록 주어진 환경이 나쁘더라도 스스로를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자기 개발'이라는 신이 주신 명약을 지니고 있다. 뿌리가 자신이 처한 숙명적 한계에 지극히 취약하다고 본다면 사람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 토양을 개선해 나갈 수가 있다.
화학비료보다는 퇴비를 준비할 수 있고, 빗물을 기다리는 대신 샘물을 팔 수 있고, 암반에 부딪혀 절망하는 대신 그 바위를 뚫을 기계를 마련할 수가 있다. 나보다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과거를 거울로 보다 바람직한 미래를 열 수가 있다. 나무가 나직이 말을 걸어온다. 뿌리가 깊으면 태풍에도 흔들릴 뿐 쓰러지지 않는다고.
민병도(화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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