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덩치는 열 살 난 개다. 토종 발바리 종으로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러 다니며 '볼일'을 해결하고 똥개치고는 아파트에서도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산책을 비롯한 목욕, 털깎기 등 덩치에 관한 모든 것은 소일 삼아 아버지가 도맡아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모님이 집을 2주간 비우시게 됐다. 덩치를 아무리 아낀다 하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는 큰 딸네로 외출을 하시게 된 때문이다. 덕분에 개를 돌보는 일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새벽마다 낑낑대는 소리에 졸린 눈을 부비며 산책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 산책로는 아파트에서부터 바로 옆 초등학교까지. 그리고 덩치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아침 저녁으로 챙겨줘야 하는데, 다른 애견들처럼 사료를 먹는 게 아니고 밥을 먹기 때문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이 상황에서는 개를 위해 밥을 해야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굶길 수는 없으니.
새벽 산책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코너 길에서 시베리안 허스키와 발바리가 맞대면하는 사건이 생겼다. 근데 발바리가 허스키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마구 짖어대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는 낯을 가리며 주인 옆을 졸졸 따라다니던 모습과는 사뭇 비교가 되면서 우리 덩치가 세상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구나 싶었다.
덩치는 혼이 나면 꼭 눈빛을 피한다. 모른 척하거나 외면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떼를 써서라도 꼭 얻어내려고 온갖 소리를 다 동원한다. 원하면 주인이 서래도 가고, 가래도 서는 녀석이다. 자기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도 으르렁거린다. 먹을 것과 맘에 드는 암캐 앞에서는 정말이지 통제 불능이다.
덩치의 최초 주인은 나였지만 어린 시절 몇 달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아버지의 개로 지냈던 녀석을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고 보니, 고집도 '쎄고' 낯도 가리고, 자기하고 싶은 것만 하고…. '세상물정 모르는구나' 싶었다. 쯧쯧~.
그런데 동시에 떠오르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내 모습 아닌가? 고집 '쎄고' 낯 가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게 다 내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무모할 만큼 겁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겁이 너무나 많아서 방어적인 행동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모습도 읽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잃고 조부모와 유모 손에서 자라면서 어린 마음에 받았던 상처를 술 한 잔 들어가시면 읊조리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래 외로우셨던 것 같다. 개를 향한 지나쳐 보이는 사랑도 아버지의 마음속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옆에 가족들의 무심함 속에 또다시 상처받고 계셨던 것은 아닌지…. 아버지도 세상을 두려워하셨겠구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33년생 아버지. 조실부모, 전쟁,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고, 평생 장사하는 것 하나만 알고 계시던 아버지. 왜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냐고 불평을 많이 했었다. 개를 못 키우게 했던 아버지가 못마땅했듯이 어렸을 적엔 부모님의 마음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덩치와 함께 내가 얹혀사는 부모님의 집을 지키며 생각하니 다 이유가 있었겠다 싶어진다. 개 키우기를 그리 싫어하셨던 것도 생명을 하나 거두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덩치 성격은 결코 좋지 않다. 자기 하고싶은 대로다. 나는 이 녀석이 짖으면 부끄럽기도 하고, 똥개라는 걸 밝히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 아버지는 이 녀석도 나도 자랑스러워하시고 사랑하시는 게 분명하다. 품에서 떼어 놓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빈 자리를 통해 아버지를 생각한다.
덩치는 한참 전부터 산책하러 나가자고 낑낑댄다.
아버지가 더욱더 그립다.
안진희(매거진 AN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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