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어느 동네 할 것 없이 '공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꼭 한둘은 있었다. 공주 엄마는 저녁이 되면 골목길에서 놀고 있을 딸을 찾아 다녔다. '공주야 밥 먹자.' '우리 공주 못 봤니?' 그 계집아이는 도무지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와는 영 딴판으로 선머슴 같았다. 좁은 골목 안에 들어앉은 공주의 집은 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을 만큼 컴컴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그 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공주였을 것이다.
갑자기 웬 공주 타령인가 싶겠지만 '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필요하다'(공지희 글/낮은산 펴냄)는 새 책을 읽고 문득 기자의 유년시절에 볕이 잘 들지 않는 집에 살던 우리 동네 공주가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필요하다'는 요즘 출간되는 생활 동화로는 흔하다 싶은 왕따와 가난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공주라니. 언제부턴가 공주는 공주병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데, 공주가 꼭 필요하다니 무슨 말일까. 주인공 한송이는 뚱뚱하고 말을 잘 더듬고 소심한 아이다. 그런 송이에게 다가온 친구가 춘희다. 춘희에게는 특이한 점이 많다. 차림새나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 발목과 손목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닌다. 머리도 남자애들처럼 짧다. 작은 실내화는 늘 구겨 신고 다닌다. 남자애들과 딱지치기를 해도 따는 쪽은 늘 춘희다. 어느 날 춘희는 '사실 나 공주야.'라며 송이에게 비밀을 속삭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춘희의 집은 궁전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무정동 재개발 6구역'. 오밀조밀 붙어있는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허물어져 있다. 그 꼭대기 판잣집이 춘희의 집이다. 깡마른 채 누운 아버지가 겨우 "우리 공주님 왔어?"하고 말한다. 춘희는 밀가루만 넣어 만든 하얀 부침개를 아버지 입에 떠 넣어 드린다. 친구에게 딱지를 팔아 번 3천 원으로 산 밀가루다. "역시 우리 공주 부침개 최고야."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든다.
"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있어야 해. 우리 공주님, 하고 부를 공주가 꼭 필요하다구. 단 한 사람만의 공주도 있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공주가 필요해. 그래서 난 내가 공주란 걸 믿어."
한참 시간이 흘렀고 송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춘희와 헤어졌다. 춘희의 집은 굴삭기가 다 밀어버렸고 춘희는 이사를 갔다. 하지만 춘희가 어느 곳에서든 씩씩한 공주로 살아갈 것이라고 송이는 믿고 있다.
소중한 누군가의 힘이 되기 위해 공주가 되어 주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런 공주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삽화가 크고 글이 많지 않은 책이라 아이들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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