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밀양은 경북의 안동 못잖은 명승지와 유교문화 유적지, 천혜의 자연이 곳곳에 숨쉬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밀양강 절벽 위에 세워진 웅장한 영남루는 경관이 빼어났다. 시원한 강바람이 머릿결을 스치는 영남루에 오르면 잘 정비된 맞은편 강변초지와 한 눈에 들어오는 밀양시 전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저 멀리 영남 알프스의 준봉들은 파란 하늘 속 구름을 꿰뚫고 아래 들판은 녹음이 짙어지는 풍경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각 초입엔 대중작곡가 박시춘의 생가가 있고 아래는 조선 명종 때 죽음으로써 순결을 지킨 밀양부사의 딸 아랑을 추모하는 아랑각이 있어 여인의 정절을 대변한다.
한 조각 강물이 일렁이자 초여름 햇살에 비친 초록의 이파리들은 선비의 기개인양 서슬 퍼렇게 반짝이고 강변 한 쪽에 조성된 철쭉군락은 여인의 단심(丹心)인양 붉디 붉어진다. 이 때 절벽 중턱 무봉사에서 목탁이 울린다. 기개도 단심도 대승(大乘)의 울림 안에 모두 녹아든다.
그리고 이내 이 대승적인 보살행은 사명대사 유적지에서 호국의 시대정신으로 되살아난다.
사랑채와 안채엔 당시 양반가(사명의 속성은 풍천 任씨)의 문방 소품류가 전시돼 있고 맞은편엔 충의문과 사명대사 기념관, 중앙광장 및 선친의 묘가 유적지로 복원돼 있다. 주변산세는 일견하기에도 큰 인물이 날만한 명당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 사대부의 정신세계는 유사시엔 호국의 충으로, 평상시엔 효의 실천과 내면의 이상향을 꿈꾸는 듯 했다.
무안면 연상리 무신 박곤(朴坤'조선 초기의 무장)의 생가 부속건물인 어변당은 조선시대 별당형 사랑채의 전형이다. 어변당 앞 네모난 연못인 적룡지는 사대부의 풍류와 갸륵한 효심이 낳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잉어요리를 좋아하던 노모를 위해 박곤이 연못을 파고 잉어를 기르던 어느 날 자라에게 먹일 뻔한 잉어를 구해주게 된다. 꿈에 이 잉어가 붉은 용으로 변해 승천하며 붉은 용비늘을 남기게 되는데 이 비늘로 갑옷을 만들어 입은 박곤은 이 후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어변당 향토박물관엔 조선조 관원 교체 때 전임자의 책임을 해제하던 해유(解由)문서 등이 보관돼 있다.
생가로 치면 부북면 제대리엔 고려조 길재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의 도통을 세운 점필재 김종직의 집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인 강호산인 김숙자(金叔滋)가 처음 거처를 정하고 점필재가 태어난 이곳은 재사로는 추원재(追遠齋)요 당호로는 전심당(傳心堂)이라 불린다.
6칸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고고한 선비의 기풍을 닮아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다. 당시 일반적인 선비의 살림채 규모로 지어졌다.
명색이 점필재의 고향에 서원이 없을까. 그래서 찾아 간 곳이 예림서원이다. 명종 때 지어졌고 현종이 편액을 내린 사액서원인 예림서원은 앞에 교육영역, 뒤에 제례영역을 갖춘 전형적인 서원의 구조로 오롯이 보존돼 있다.
독서루, 구영당, 육덕사가 일직선에 배치되고 좌우에 돈선재와 직방재가 있어 유생들이 거처하면 공부하던 곳이 있고 장판각엔 김종직의 저서와 문집이 책판 형태로 보관돼 있다.
예림서원에서 반대편 얼음골 가는 길에 들른 무안면 무안리에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검은 화강암에서 땀을 흘린다는 유명한 표충비각이 있다. 남붕선사가 사명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 앞 수령 300년 된 우산 형태의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밀양을 중심으로 서쪽 방면 유적지를 둘러봤다면 무더운 여름 바위틈새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나오는 얼음골은 밀양의 동쪽에 있다.
영남 알프스 지류인 천황산 북쪽 계곡에 자리한 산내면 남명리 얼음골의 결빙지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이상기후장소이다. 해발 700m지점에 경사가 60도인 이곳은 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나오며 계곡물에 손을 담그면 한 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
결빙지 앞 바위에 걸터앉으니 비로소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찬 공기는 무거워 아래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어 얼음골 어디에나 앉아 있으면 냉기를 느끼게 된다는 게 관리인의 설명이다.
결빙지 왼편으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가면 천혜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가마볼 계곡이다. 50여m의 협곡과 가마볼 폭포가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흘려 내린다. 바깥 기온이 높을수록 계곡 안은 더욱 서늘해진다.
얼음골 입구 작은 사찰인 천황사 대명광전 안 석불좌상도 볼거리. 광배만 없을 뿐 대좌와 몸체가 붙은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우아한 어깨선과 당당한 가슴, 살아있는 듯한 젖가슴과 얇은 가사가 사실감 높게 표현돼 있다. 하대엔 정교한 사자가 11마리 양각돼 있으며 석불을 떠받치고 있다.
사찰 안 감로수 한 잔을 들이키며 서쪽 하늘을 보자 어느 덧 하루해가 재약산을 넘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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