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연인

1991년 '뜨거운 영화' 두 편이 극장에 걸렸었다. 하나는 샤론 스톤이 주연했던 '원초적 본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인 마치 주연의 '연인'이었다. 호기심을 끈 쪽은 '연인'이었는데, 주연을 맡은 소녀의 눈빛 때문이었다. 소녀는 양 갈래 머리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눈빛은 부끄러운 듯 도발적이었다. 도발성은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아직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모험심을 포함하고 있었다. 양 갈래 머리의 순결함과 억지로 바른 듯한 입술의 덜 익은 요염함, 포스터 속 소녀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인'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에로틱하면서도 슬픈 사랑 영화 중 하나이다. 툴롱을 오가는 선상에서 소녀는 한 남자와 만난다. 최신 유행 의상을 입기에 턱없이 가난한 소녀는 남자 모자에 잠옷을 걸치고 삐딱하게 입술을 칠한 채 서 있다. 세련된 파리지앵처럼 보이고 싶지만 그녀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중국 부호의 아들인 남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초라한 소녀를 차 안에 태운다.

소녀는 프랑스인이지만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소녀이다. 남자는 여자를 기숙사까지 태워주며 아무 말 없이 손을 잡는다. 양가휘가 연기한 남자는 일센티 정도씩 손을 뻗어 마침내 소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들의 정염은 손가락을 매개로 증폭되어 간다. 내가 가장 에로틱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들 둘은 서로를 원한다는 감정 자체로 차 안을 뜨겁게 달군다. 그들이 마주잡은 손은 그 어떤 남녀의 얽힘보다 강렬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다.

청년과 소녀의 마주 잡은 손에는 간단히 발화하고 소진되는 욕망이 아닌 쉽게 폭발할 수 없는 감정의 잉여들이 남아 있다. 섹스가 욕망의 발산이라면 그들의 행위는 체온을 통해 욕망을 가열하는 애타움으로 긴장되어 있다. 이 사소한 움직임은 영화 '연인'이 지닌 품격있는 에로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두 번 째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소녀는 남자에게 자신이 유린당했다고 여기고 매몰차게 그를 떠난다. 프랑스로 떠나는 그녀를 남자는 멀리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고급 승용차 안에 모습을 감춘 그의 모습을 원거리에서 비춰준다. 남자는 울고 있을까? 알 수 없다. 관객도 모르지만 소녀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다만 어설펐던 젊음의 한 때와 결별하듯 그 남자의 잔영을 지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프랑스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소녀는 드뷔시의 '달빛' 연주를 듣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정염이고 욕심이고, 호기심이자 욕망이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소녀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자취를 망연히 바라보았던 소녀는 그 때서야 사랑임을 깨닫고 흐느껴 운다.

사랑은 그렇게 욕망보다 늦게 온다. 뜨거운 감정의 부유물들이 가라앉고 나서야 사랑은 말갛게 떠오른다.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인 드뷔시의 선율은 그녀의 울음과 함께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욕망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은 곧잘 후회와 겹쳐지곤 한다. '연인'은 그래서 사랑에 관한 아프고도 성숙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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