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21)빨치산의 흔적

지리산은 안다! 사라져간 2만여명의 통곡소리

지리산만큼 슬픔과 고통으로 뒤덮인 곳도 없다. 산을 무대로 같은 민족이 편을 갈라 죽고 죽였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1949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름 모를 계곡과 능선에서 사라져갔다. 아직도 골골마다 그 비극의 흔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선녀굴, 천왕봉 비트(비밀아지트) 등에 남아있는 총알자국보다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 아픔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게 더 슬프다.

지리산의 북쪽 기슭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마을 옆에 소나무들이 서 있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1949년 국군 토벌대가 주민들을 집단 학살해 파묻은 곳이다. 인근 마천초교에 주둔한 국군 3연대가 빨치산에 공격당해 수십 명이 죽은 데 대한 보복 학살이었다. 희생자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게는 70명, 많게는 120명쯤이라고 한다.

"모두 죄없는 양민이었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끌고 왔는데 여자도 있고 10대도 있었어. 전부 미쳐 돌아갔으니…." 주민 박동식(82) 씨는 "그때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낮에는 국군 토벌대, 밤에는 빨치산이 통치했던 곳이었으니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근 내마마을의 강성도(70) 씨는 "남자들은 빨치산이나 국군의 보급대로 끌려다니며 노역을 해야했지. 한 발만 잘못 삐끗해도 '좌익분자'로 찍히거나 '반동'으로 몰리기 일쑤였다."고 했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성산 공동묘지에도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후 1948년 11월 19일 구례경찰서에 임시보호실에 갇혀 있던 주민 68명이 학살돼 파묻힌 곳이다.

여순사건 구례유족회 박찬근(72) 회장은 학살 하루 전 헌병들에게 연행되던 선친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초교 6학년이던 박 회장은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 아버지를 찾는 헌병들을 집으로 안내했다고 한다. 헌병들은 당시 1주일 정도 집에서 얹혀살던 아버지 친구의 짐 보따리를 뒤지더니 '조사할 것이 있다.'며 아버지를 경찰서로 데려갔는데 그것이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그날 밤 구례경찰서는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고 보호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시신은 지게에 실려 경찰서 뒤편 봉성산 자락에 매장됐다고 한다.

"그 당시 선친뿐만 아니라 구례에서만 죽은 사람이 3천 명이나 됩니다. 빨치산이나 군경 토벌대에 죽었든 간에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이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1991년 결성된 유족회는 현재 120명만 가입해 있다. 유족들은 피해의식 때문에 가입을 피하는 경향이 있고 유족회 활동을 사시적으로 보는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상처가 제대로 씻겨지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6월 6일이면 10년째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지리산 자락의 견불사(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소재) 대풍 범각 회주는 "견불사 창건 때 기도 때마다 나타나는 군경과 빨치산 원혼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위령제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경남 산청·하동·함양 3개 군이 1998년부터 '빨치산 루트'를 개발하고 토벌전시관을 만드는 등 관광상품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빨치산 루트들은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와 합의없이 추진되면서 등산로가 대부분 폐쇄돼 돈만 날린 꼴이 됐다. 토벌전시관도 볼거리 부족으로 인기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민족의 비극적인 현장을 관광상품으로 다루려 했던 것도 문제지만, 이를 제대로 조사·연구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지리산을 다녀와서

"왜 빨치산인가?"

취재팀은 이번에 '빨치산의 흔적'을 다루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했다. '20세기의 추억'이란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데다 '원호의 달'이라는 현재적 시점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는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던 시대였다. 좌로 우로 갈려 서로 죽이고 고통을 주던 시대였다. 중재자나 방관자는 어디에서든 용납되지 않았고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평등 세상을 이루겠다는 이념이나 삶의 질을 높여주겠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오직 목숨 건 대립만 있었을 뿐, 인간의 존엄성이나 삶의 가치는 무의미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21세기다. 이데올로기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좌든 우든 둘 다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론에 불과할 뿐인데 그것에 매몰돼 있을 이유가 없다. 취재팀이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도 이제는 가까운 거리에서 이를 관조할 만큼 폭이 넓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소모적인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만큼 고통을 겪었는데도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naver)지식검색에 '빨치산'을 찾아보면 이런 질문이 여럿 올라있다. "저는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가봤는데 빨치산은 어디 있나요?"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좌·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실용성만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시대정신일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