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오늘-이한열 사건

1987년 6월 9일, 연세대 학생 1천여 명이 다음날 예정된 6'10 국민평화대행진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했다. 4'13 호헌조치는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더불어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과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다 전경들과 충돌, 이 과정에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지 얼마 안 있어 발생한 일이어서 파장이 매우 컸다. 국민들의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른바 '6월 항쟁'의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정부는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발표한다. 이한열은 뇌사상태에서 27일 만인 7월 5일 심폐기능이 정지돼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혔다.

이한열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절정이었으며 비장한 마무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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