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통일자전거대회가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북측은 통일자전거대회 참가자들에게 평양의 속살 일부를 드러내는 호의를 보였다. 하지만 주민들과의 직접 접촉은 엄격히 통제했다. 제한된 공개였으나 평양 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2007년 5월 말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전한다. (편집자)
◇모내기
5월 말 평양 주변은 '모내기 전투'로 분주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과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향산고속국도 주변 곳곳에 붉은 '모내기 전투'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농민은 물론 인민군과 학생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휴일도 없었다. 통일자전거대회가 열린 지난달 27일(일요일) 평양~남포 청년영웅도로 주변에서도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트럭에선 모내기꾼의 힘을 돋우기 위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고, 삼삼오오 모여 '곽밥'(도시락)을 먹는 장면도 자주 목격됐다. 휴식시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모습도 보였으나 자전거를 탄 채 '북측 심판원'의 눈길을 피해 디지털 카메라를 끄집어내기는 어려웠다. 이동 중 사진 촬영을 금지했고 통일자전거대회 행사 당일엔 아예 카메라 소지를 막아 '모내기 전투'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평양 시가지와 시민
평양은 '평평한 땅'이라는 뜻에서 불린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평양 부근은 높은 산이 없었다. 평양은 '柳京(유경)'으로도 불렸는데 대동강변은 물론 시내 곳곳에 버드나무 씨가 흩날렸다. 평양시가지는 크게 본평양·동평양·서평양으로 구분된다. 본평양은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에 둘러싸인 지역, 동평양은 대동강 동안의 신시가지역이며, 서평양은 스포츠 시설과 고층아파트가 밀집된 신흥주택가다. 중심가로는 창광거리, 승리거리, 천리마거리, 개선거리, 광복거리, 청춘거리 등이 있다.
평양 방문 경험자들은 평양 시가지가 예전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리랑축전 관람 차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는 방북단의 한 인사는 "2년 전 평양 시내에서 밤에 불이 켜진 곳은 주체탑이 유일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통일자전거대회 참가자들의 숙소인 양각도호텔 47층 회전식당에서 본 2007년 5월 말 평양의 밤거리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전력사정이 한결 나아진 듯 시가지 곳곳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지난달 28일 오전 평양 개선문 근처 북새지역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김정숙 탁아소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버스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바람에 방북단은 북쪽 주민들의 평소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가졌다. 방북기간 동안 광복거리 등 평양시내 큰 도로를 버스로 수없이 오갔다. 그러나 평양역 주변만 붐볐을 뿐, 출퇴근 시간대조차 길거리에 평양시민들이 많지 않아 늘 의아했다. 300만 명이 넘는 평양시민들이 모두 어디 숨어버렸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새지역 아파트 단지를 돌아본 뒤에야 평양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파트 단지 입구엔 남새(채소)상점과 식료품 가게, 식당 등 상점들이 잇대어 있었다. 단지 내 녹지에선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고, 적잖은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목격됐다. 또 전차와 버스 정류장마다 판매대가 설치돼 음료와 과자 과일 등속을 팔고 있었고, 평양의과대학과 국제문화센터 주변지역엔 신축 건물도 들어서고 있었다.
◇평양의 학교들
이번 평양 방문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은 평양의 보육시설과 학교들이다. 북측은 대회 참가자들에게 김정숙 탁아소와 금성학원,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김책공대 전자도서관 등을 보여주었다. 평양 모란봉구역 북새지역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김정숙 탁아소는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보육기관으로 1층과 2층은 탁아소이고 3층부터 5층은 유치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요 '고향의 봄'이 울리는 가운데 방북단을 맞이한 탁아소 소장은 1988년 4월 개원했고, 나이가 2년 6개월에서 4년 사이인 아동 500명을 수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탁아소 주변에 사는 부모들이 월요일 아침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토요일 저녁 데려가는 '주 탁아소'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탁아소 측이 방북단을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은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 고향집' 모형이 있는 방이었다. 보육교사는 김일성 주석이 뛰놀던 '군함바위' '썰매바위' '만경봉' 등 만경대 주변지역 모형을 가리키며 아동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어 탁아소 아동들의 즉석 공연과 무용 등을 관람한 뒤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을 방문했다. 평양음악대학은 성악학부(6년), 민족기악학부, 양악학부, 작곡학부(5년) 등 4개 학부 38개 학과과정 외에도 특설학부인 박사원(3년6개월) 과정이 꾸려져 있다. 평양음악대학 측은 학생 800명에 교직원이 300명이며 평양 이외 지방학생 비율이 6대 4가량으로 더 많다고 밝혔다. 마침 실기 시험일이어서 학생들의 연주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소년학생궁전 뒤편에 자리 잡은 금성학원은 초등부 4년, 중등부 6년, 전문부 3년이 통합된 학교이다. 이 학교의 전신은 금성 제1중학교로 전문부 과정이 새로 생기면서 중학교 명칭을 사용하기 곤란해 금성학원으로 바꿨다고 한다. 금성학원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금성학원은 일반반과 특기반으로 나눠져 있는데 남쪽의 '특목고' 격인 특기반이 특히 주목됐다. 금성학원 특기반은 문화예술과 컴퓨터부문 영재 학교다.
지난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미모의 여학생 응원단 상당수가 금성학원 문화예술부문 특기반 출신이었다. 춤과 노래, 악기 연주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외모가 뛰어난 학생들을 평양 외에 북녘 전역에서 선발한다고 했다. 금성학원 측은 방북단을 위해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쌍둥이 자매를 비롯한 다수 학생들을 동원해 40분가량 공연을 펼쳤다.
금성학원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컴퓨터분야 수재들도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컴퓨터반 복도 한쪽에는 중학 4학년과 5학년 학생들의 학년별 월별고사 점수와 등수가 사진과 함께 붙어 있었다. 닷새마다 보는 쪽지시험과 매달 치르는 월별고사 성적이었다.
수재들의 치열한 경쟁과 성적 공개는 북쪽 이공계 인재들이 모이는 김책공대도 마찬가지였다. 김책공대의 김성일 전자도서관장은 매월 시험을 치르고 일등부터 꼴찌까지 과목별 점수와 전체 점수, 등수, 개인 사진을 게시한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성적 서열이 크게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여학생들은 입학성적은 좋으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남학생에게 뒤져 원인을 모르겠다며 웃었다. 김책공대 전자도서관은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북녘의 이공계 요람이다. 최신 컴퓨터와 도서 등은 그런 대로 갖추고 있었으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렇게 빛 바랜 종이에 등사된 교재를 사용했고, 종이를 아끼려는 듯 깨알 같은 글씨로 공부하고 있어 안쓰러웠다.
◇ 북한의 영어 배우기 열풍
남쪽에서 영어는 무조건 배워야 하는 생존 수단이다. 영어 구사능력에 따라 계층과 소득이 구분될 정도다. 북쪽도 영어공부 열풍은 남쪽에 버금갔다. 외국어 배우기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 사이에도 확산되고 있다. 김책공대 전자도서관 등 대학은 물론이고 인민대학습당에서도 영어책을 펼치고 공부하는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됐다.
남쪽의 국립 중앙도서관 격인 인민대학습당은 5개월 단위로 1년에 두 번 영어강좌를 '조직'(개설)하고 캐나다 원어민 강사까지 채용해 종전의 영국식 영어가 아닌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통일자전거대회 남측 참가자들이 인민대학습당을 방문했을 때 어학실습실에서 마주친 북쪽 주민들의 영어학습 열기는 남쪽보다 더 뜨거웠다. 캐나다인 강사가 방북단과 북측의 인민 한 사람이 서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도록 주선했으나 방북단의 '밑천'이 더 일찍 드러나 곧 중단되고 말았다. 인민대학습당 외에도 평양시내의 많은 외국어 강습소들이 수용능력을 초과하고 있고, 중국어의 경우 강습 희망자가 너무 많아 자격시험을 거쳐야 수강이 가능할 정도라고 북측 관계자는 전했다.
북쪽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 학습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과학기술 중시정책을 추진하면서 외국의 선진 기술을 습득하려면 어학 능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등 다른 제2외국어 배우기에도 열심이었다. 방북단의 숙소였던 양각도호텔의 한 판매원은 동료들 중 중국어를 잘하는 판매원을 부러워했다. 판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국어를 능숙히 구사하면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매출을 늘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영창 논설위원 cyc58@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국가 위기에도 정쟁 골몰하는 野 대표, 한술 더뜨는 與 대표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김건희 특검법, 대통령 거부로 재표결 시 이탈표 더 늘 것" 박주민이 내다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