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6월 그날의 함성] (上)20년전 현장의 3인 기억

중앙로 최루탄 연막 자욱…연일 투석전

▲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정제봉·도태호·조광진(왼쪽부터) 씨가 민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정제봉·도태호·조광진(왼쪽부터) 씨가 민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그해 6월, 온 나라는 초여름의 날씨보다 더 뜨겁게 들끓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4월 13일)에 반발해 일어났던 시위행렬은 6월로 들면서 경찰이 제어하기 힘든 대규모로 바뀌었다. 시민들의 힘은 위대했고, 결국 군사 독재정권은 항복문서와 다름없는 대통령 직선제 등이 포함된 6·29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0년, 중년이 돼 21세기를 살고 있는 당시 주역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들이 기억하는 6월 항쟁과 그 의미를 3회에 걸쳐 되돌아본다. 편집자

1987년 6월, 민주화 현장을 누볐던 386세대 3명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20년 전, 거리를 내달리던 열혈 청년들은 이제 시민운동가와 치과의사, 자영업자로 중년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해 초여름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광진(46·대구 KYC공동대표) 씨는 "사실 정치 성향의 시위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어요.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웬 데모질이냐'는 비난을 듣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6월이 되면서 시민들의 눈빛이 격려와 적극적인 호응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경북대 대의원회 의장이던 도태호(43·섬유업체 운영) 씨는 "6월 항쟁 이전까지 대구는 학생·사회 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다만 1987년 비리 총장 퇴진 등 학내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면서 사회민주화운동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도 씨는 "경찰의 저지를 피하기 위해 각 과나 단과대 별로 10~20명씩 대구백화점 등 시내에 모였다가 시위를 벌이기를 반복했다."며 "대구백화점 앞 방범초소를 점거한 뒤부터는 이 일대가 자연스럽게 학생 시위의 거점이 됐다."고 했다.

공중보건의로 일하며 시위 현장을 오갔다는 정제봉(47·치과의사) 씨도 "6월 10일을 기점으로 시위대가 경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이날 학생들과 재야단체가 합동으로 도심 곳곳에서 벌인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대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는 것. 이날 대구 도심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동신교 부근에서 경찰봉쇄로 막혔던 이전과는 달리 시위대 일부는 동아백화점에서 MBC네거리까지 이동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남문시장에서 한일극장에 이르는 중앙로는 매일 돌무더기로 뒤덮였어요. 시위 군중이 인도블록을 깨 투석전을 벌인 탓이었죠. 새벽이면 환경미화원들이 도로를 모두 치웠지만 밤만 되면 다시 돌로 뒤덮이는 일이 반복됐어요."

시위는 매일 계속됐고 6월 하순이 되면서 비폭력·평화 시위 분위기가 확산되자 시민들의 호응은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조 씨는 "시위대에 우유나 음료수를 건네주는 시민들이 적잖았고 박수로 호응하는 시민들도 많았다."며 "시위가 거듭될수록 '대구에서도 이런 싸움이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고 자신감도 갈수록 커졌다."고 했다.

절정에 이르렀던 민주화 시위는 '6·29 선언'을 기점으로 수그러들었지만 이들은 그날의 함성만큼은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을 계속했던 조 씨는 제적과 복학을 거듭하며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민주주의민족통일대구경북연합에서 사무처장을 지내는 등 시민운동에 열정을 쏟은 조 씨는 "시민의 힘으로 사회 변혁을 이끌어냈던 그해 6월의 기억이 지금까지 시민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했다. 정 씨는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경북 영양 가톨릭농민회에서 2년 6개월 동안 농민운동을 벌였고 지금도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 씨는 "변혁의 현장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라며 "사회에 대한 인식의 틀을 넓힐 수 있었던 빛나는 청춘의 시기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고 입을 모았다.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진보를 이뤄냈지만 사회적·경제적 진보로까지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

"민주주의는 발전했지만 20년간 국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됐어요. 대다수 청년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낮은 임금이라는 구조적인 병폐에서 허덕이고 있죠. 20년 전 그날, 선배들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 세상을 바꾸었듯이 청년들도 행동으로 사회 참여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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