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학저널리스트 니와코이치가 지은 '병원침몰'은 일본 의료산업의 몰락을 예고해 화제가 됐었다. 이 책에선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의 틀에 길들여진 일본 의료계의 심각성과 시장개방을 통해 선진화된 미국 의료시스템이 도입될 경우 의료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 경쟁과 도태의 과정을 거치는 의료계가 '빅뱅'에 휩싸일 경우 결국 구조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 병원은 시장 원리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해 외국계 자본에 잠식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의 의료산업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어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수도권 의료기관에서 진료받는 비 수도권 환자가 최근 수년간 10% 이상씩 증가세에 있다고 한다. 서울의 대형병원들이 이미 수도권의 의료수요를 초과하고 있는데도 앞 다투어 병원 확장에 열을 올리며 경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방 환자들을 흡수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보도가 나올 때마다 대구에서 국립대병원을 경영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맘이 편치 않다. 더욱이 지방의 의료수준이 서울보다 낙후됐을 것이라고 오해받을 때는 난감하기만 하다. 사실 각종 시설과 서비스 제공의 측면에서 서울에서 배워야 할 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의료수준만 비교할 때 오히려 기술적인 부분에서 일부 우위에 있는 분야도 있을 정도로 수준 차이는 없다. 지방의 병원이 서울에 비해 떨어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오해는 반드시 해소돼야 한다. 최근 보도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06년 6대 암 수술건수 통계를 보더라도 각 분야에서 상위권에 든 지역 대학병원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수도권으로의 환자유출은 적시에 필요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이 가장 많고 암 등 중증질환에 대한 재확인, 그리고 중앙언론의 홍보성 기사에 현혹된 막연한 기대감 등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막연히 이름을 좇아 수도권 대형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과 간병의 어려움으로 되돌아오는 환자를 많이 봤다. 또 대장암과 같은 큰 수술 뒤 경과 체크를 위해 서울을 오가며 겪는 고통을 목격할 때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경북대병원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K씨는 대구에서 자라 미국유학을 떠나 박사학위와 미국시민권 취득 후 국제변호사인 한국인과 결혼, 두 자녀를 둔 30대 중반의 엘리트 여성이다. 그녀가 풀브라이트 장학생이 되어 연세대에 초청 근무하던 중 암 중에서도 희귀한 맹장암에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형병원에서 수술과 항암치료까지 받았는데도 불구, 1개월도 되지 않아 복막과 다른 장기로 전이돼 말기 암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의 치료방법으로는 해결 방법이 없고 단지 특별한 기법을 시도해 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 그래서 미국에 있는 이 분야 전문가와 접촉해 보니 우연하게도 경북대병원 외과의 모 교수가 문하생으로서 추천됐다. 나중에 털어놓은 이야기지만 '차라리 이 교수가 서울서 근무했다면 이렇게 고심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과 한국의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구행을 결심했고, 경북대병원에서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1년 정도 지난 요즘, 그녀는 건강을 회복해 국내외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뒤늦게 알았지만, 그 외과 교수는 의학자 사이에선 손꼽히는 명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서울은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일 뿐 모든 것이 최고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이런 예가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지역 의료계가 지역민의 신뢰를 받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자기성찰 아래 지역 환자의 외부유출을 막기 위해 대구경북병원회, 대구시의사회, 대구시가 전국 처음으로 손을 잡고 공동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대구·경북의 80여 개 병원은 대구시의 '건강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와 연계해 응급의료센터 간의 핫라인 개설, 공동홍보팀 운영 등 병원 간 협력적 상생관계와 특화분야 도출에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또 그동안 홍보 미숙을 반성하고 명의의 반열에 드는 지역 의사들을 적극 알려 대구를 건강도시의 대명사로 만드는 데도 주력해 나갈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활동은 타지역 환자들이 우리 지역을 찾도록 만드는 장기 목표의 첫 단추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선 중앙 및 지방정부, 지역 언론의 적극적 지원과 각 보건단체 종사자들의 강력한 의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환자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다. 'KTX는 상행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행선도 있다.'
이상흔 경북대병원장·대구경북병원회 회장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