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인데도 선운사 주차장은 발을 디딜 데가 없을 정도로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멀리 미당이 선운사에 들를 때마다 자고 간다는 동백호텔이 보인다. 미당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밟힐 듯 선연하다. 동료들과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백호텔 1층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채비빔밥이 아주 맛있다. 일행은 아이처럼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선운사로 올랐다. 눈이 내린 선운사 가는 길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올라가는 길 곳곳에 늘어선 포장마차도 정겹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기대한 나로서는 다소 실망스럽다.
선운사에 도착했다. 선운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동백꽃이다. 대웅보전 부처님 뵙는 걸 뒤로 미루고 대웅보전 뒤뜰로 먼저 다가갔다. 선운사 동백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실 다른 지역의 동백에 비해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다. 작년 완도 구계등에서, 그리고 보길도 눈 속에서 우연히 만난 동백꽃에 비해서도 별로다. 대웅보전 뒤 살짝 비탈진 언덕으로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있어, 봄이면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데, 울타리를 쳐 놓아 동백숲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실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추억이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의미는 부여하는 사람들의 몫이니까. 선운사 동백이 애절한 이미지를 지니게 된 데에는 절 자체의 이미지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선운사는 백제 때 지어진 고찰로 흔히 천년사찰이라 부르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천년사찰이 수도 없이 많지만, 선운사처럼 쓸쓸함을 주는 곳은 찾기 힘들다. 대웅보전의 기둥은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썼는데, 빛바랜 단청이 그대로 쓸쓸함을 자아내고, 대웅보전 앞 돌계단은 거의 무너져 있어 쓸쓸함이 지나쳐 쇠락한 이미지까지 풍기고 있다. 절 자체가 하나의 유적 같은 느낌이다. 이 분위기가 선운사의 이미지이다. 이런 선운사 뒤의 동백꽃이 송이송이 뚝뚝 떨어지니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시인과 가수들의 표현도 한몫을 했다. 최영미 시인은 잠깐 스쳐버린 인연처럼 져버린 동백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운사에서'를 썼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없이/ 님한번 생각할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중략)/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음유시인 송창식은 한술 더 떠 사랑하는 님이 절대 못 떠나게 하기 위해 슬픈 가슴을 찢어 보여주는 대신 '눈물처럼 지는 선운사 동백'을 보라했다.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마음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못 떠나실 것 같은 님은 결국 떠났고. 서러운 동백도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다.
역시 선운사에서 채 십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고창 선운리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고향집 앞 동백을 그의 글 속에 자주 담아냈다. 특히 미당은 자신의 시비에 새긴 시 '선운사 동구'에서 동백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노래했다. 미당의 시에 나타난 표현처럼 계절이 일러 아직 동백꽃은 활짝 피지 않았다. 미당이 만난 막걸리 집 여자도, 육자배기 가락도 없었다. 세월의 흐름은 이렇듯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나 보다.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죄짐 많은 삶에서 이렇듯 자비로운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맑은 계곡물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버들치, 피리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들은 도열을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선운사를 지키는 진정한 사천왕들이리라. 내려오는 길에 미당 시비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한 후 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1980년대의 화두인 이념이 사라진 1990년대의 환멸을 솔직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끌어냈던 시집이다. 청춘과 사랑, 운동권의 고뇌, 사랑과 혁명 같은 이질적 요소를 구체적 삶 속에서 융합시킨 시 5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이념의 홍수가 지나간 후 그에 가담했던 세대의 과감하고 솔직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 1980년대의 사랑과 아픔과 상처와 위선, 부딪치며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 날것 그대로, 때로는 비틀려 더욱 투명해지는 시어들로 새겨진다. 시집 안에는 두 가지 개념이 늘 대립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나-너', '봄-가을', '안-밖', '과거-현재' 등이 그것이다. 과거에 뜨거운 봄, 80년대의 중심에서 소리 질러 본 적이 있는 화자는 이제 가을에 서서 과거를 회상한다. 결국 화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나아가 독자를 슬프게 하는 화자의 목소리, 그것은 '서른, 잔치는 이미 끝났다'는 아픈 외침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