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집을 나서면 길이고 길에서 벗어나면 집이다. 백두대간의 뼈대를 잡은 '산경표'를 쓴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은 길과 집을 하나의 연속선상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자동차가 일상생활의 필수품이 된 요즘에는 길은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용도가 아니라 자동차가 달리는 용도로 쓰인다. 사람이 걸어다니거나 내릴 수도 없고 자동차만 다니는 '자동차전용도로'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세상이다.
속도가 경쟁력이긴 하다. 그러나 느릿느릿 걸으면서 보는 세상은 또 다르다. 속도를 내지 않아도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다른 자동차들이 없는, 그런 호젓한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 없을까. 굳이 여행가방을 꾸려서 번거롭게 떠나는 채비를 차리지 않아도 좋은 그런 길 말이다.
연인이나 가족과 모처럼 드라이브하기 좋은 국도가 있다. 전북 무주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10승지 중의 한 곳으로 꼽힌다. 승지(勝地)란 자연경관과 거주환경이 뛰어난 곳으로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향이다.
경북 김천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30번 국도를 가다 보면 나지막한 고개가 나온다. 고갯마루는 아주 널찍하다. 이 고개가 바로 백두대간을 넘는 덕산재(해발 644m)다. 덕산재를 넘어 계속 달리면 무풍. 무풍은 바로 정감록에 나오는 삼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다. 덕산재는 바로 이 무풍으로 들어서는 초입이다.
김천에서 덕산재로 오르는 길은 호젓하다. 10여 분을 달려도 뒤따르거나 마주치는 자동차가 없다. 어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요즘처럼 고속국도 같은 국도가 뚫리는 세상에 이런 한적한 국도를 찾은 것은 행운이다. 느릿느릿 S자 모양의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가 보자.
고갯마루에 올라 잠시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해본다. 남쪽으로는 가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민주지산과 삼도봉이 보인다. 방금 올라온 김천 쪽으로는 도로가 한눈에 바라다보일 정도로 시야가 탁 트여있다. 고개는 넓다. 덕산재가 아스팔트로 포장되기 전에는 '주치'라고 불렸다.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에는 '주치마을'이라는 이름이 아직 남아있다.
한때 이곳에는 주유소를 겸한 휴게소가 있었다. 그러나 오가는 나그네가 없어 한동안 폐가처럼 문이 닫힌 휴게소는 어느새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가 자리 잡은 대덕산 산삼집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부처도 모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 닫힌 집앞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풀을 매고 있다. 말수가 적은 할머니는 아들이 '스님'이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트럭을 몰고 온 남자는 덥수룩한 수염의 심마니 행색이다. 그는 "아직 버릴 것을 다 버리지 못해서 이러고 있다."며 산삼을 캐러 다닌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물 한 그릇과 칡즙 한 모금을 마셨다. 팔순이 다 된 그의 어머니는 2대(代) 전에 먹고살 것이 없어서 창녕에서 무풍으로 왔다고 했다. 정감록에 나오는 길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어찌 됐든 그들은 살아남았다.
덕산재를 내려가서 무주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20여 분을 달렸더니 무풍이다. 그리고 무주읍으로 가다 보면 '나제통문'이 입을 벌리고 자동차를 맞이한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는 '문지기'가 생겼다. 3년 전부터 백제군의 옷을 입고 나제통문을 지키고 있는 김상수(52) 씨는 "예전에는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다."며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오면 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경상도 사투리도 조금 섞여나온다. "통문 저쪽 사람들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전라도지만 예전에는 경상도 땅이었으니 경상도 말을 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30번 국도는 그렇게 변산반도까지 꼬불꼬불 이어지면서 서해바다를 보여준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백두대간 덕산재 가는 길
-대구에서는 성주를 지나 30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성주댐과 김천시 증산면, 대덕면을 거쳐 덕산재 고갯마루에 닿을 수 있다.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서는 김천나들목(IC)을 통해 갈 수도 있다. 김천IC를 나와 3번국도를 거쳐 구성면-지례를 거쳐 대덕면에 닿으면 30번 국도와 만난다. 성주쪽으로 가는 것과 시간은 비슷하게 걸린다.
▲ 전북 무주의 대표 음식 '어죽'
무주에 가면 반드시 맛봐야 하는 음식이 '어죽'이다. 생선을 갈아서 만든 죽이라고 하면 간단하다. 비릿하지 않으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어죽은 '빠가사리'라고 부르는 '자가미'의 내장을 꺼내 잘 손질한 다음 오래 삶아내면 흐물흐물해진다. 뼈를 삶아낸 국물에 쌀을 넣어 끓인 다음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완성한다. 여기에 쌀이 익으면 밀가루 수제비를 뜨고 다진 마늘과 생강, 고추 등을 넣고 끓이면 비린 맛이 완전히 없어진다. 한 그릇에 5천~6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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