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한 번씩 교육계의 촌지 문제로 매스컴이 시끄러울 때가 있는데, 촌지는 선진 사회로 가는데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악습으로 인식돼 있다. 의료계에는 이런 성격의 촌지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 과거 의료계에서도 촌지가 성행했으며 실제로 이러한 촌지는 검사 시간 및 수술 일정을 단축시키고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좀 더 선택되고 집중된 진료를 받기 위한 뇌물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촌지 근절을 위해 촌지 받는 의사를 익명으로 신고하라는 우편함을 내걸었던 시절도 있었다.
전공의 시절 한 동료 여의사는 소위 잘나가는 조폭의 주치의를 맡았는데 병실 분위기가 공포스러워서였는지 환자가 묻는 질문에 너무나도 성실히 대답해 준 탓에, 하루는 환자가 줬다며 큰 선물 꾸러미를 안고 의국에 들어왔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 모두들 놀라 말문이 막혔는데, 그 선물이라는 것이 바로 신라 금관이었다. 찜찜한 마음에 모두들 '이거 아무래도 장물 같으니 돌려주라.'고 했고 역시 깜짝 놀란 이 친구가 다시 돌려주려고 병실에 갔더니, 환자가 말하기를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이걸로 충분하지 않느냐.'며 오히려 상품권을 한 장 더 줘서 아무 말 못하고 받아왔던 일화가 있었다. 이쯤 되면 이건 촌지가 아니라 뇌물인지라 환자가 퇴원할 때까지 마음 졸이며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전공의 시절, 촌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한 중년 남성이 있었다. 중한 환자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응급실에 내려갔더니 환자의 맥박은 잡히지 않고 동공 반사가 거의 소실된 사망 직전의 상태였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아내는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살려만 달라고 사정했다. 병력으로 봐서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판단하고 바로 심폐소생술 및 전기 충격시술을 하고 밤새도록 환자 치료에 매달린 결과 비록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혈압, 맥박 등 생체 징후가 안정이 돼 다음날 심장 중환자실로 입원시키고 다른 의사에게 인계했다. 며칠 뒤 환자의 상태가 궁금해서 동료 의사에게 물어봤더니 다행히 의식이 회복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뒤 이 일을 한참 동안 잊고 지냈다.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중년 남자의 손을 다정히 잡고 나를 찾아와서는 "여보, 당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분이니 인사 하세요."라는 말에 그 남자는 90도로 정중히 인사하며, 새 돈 1만 원짜리 10장을 내 손에 꼭 쥐어 주며 "선생님 덕분에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퇴원 전에 꼭 찾아뵙고 싶었다고 하셨다. 이 일은 이후 의사로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두고두고 되새기게 했던 행복한 일화였다.
요즘도 한 번씩, 허리춤에 차고 있던 꼬깃꼬깃 구겨진 쌈짓돈 만 원짜리를 손에 쥐어 주며 선생님 맛있는 것 꼭 사드시라고 마음 써 주시는 할머님, 개원 의사인 나에게 갑상선암을 조기에 발견해 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수술 받으러 가기 전 작은 선물을 쥐어 주시던 분들은 나의 삶에 즐거운 활력소이면서 한편으론 환자들에게 더 잘해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촌지(寸志) 문화는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확산돼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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