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이달균 作 '근조화'

근조화

이달균

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

관계를 맺지 못한 死者와의 시든 동행

한번도 저를 위해 피고 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 殉葬은 진행형이다

대궁이가 잘린 흰 꽃들이 주로 근조화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창백한 도열이 될 수밖에 없지요. 행간이 자못 암울해 보이지만, 워낙 치밀한 구도가 시선을 놓지 않는군요.

삶과 죽음의 어름에서 풀어낸 생명 이미지의 밀도.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선 꽃들은 생명의 핏기가 가신, 벽을 등진 죽음의 배경으로 존재합니다. 부음이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목 잘린 꽃들의 장례'.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사자와의 시든 동행'뿐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다 꽃입니다. 애시당초 꽃으로 세상에 옵니다. 그러나 덧없는 떠돎 끝에 언젠가는 목이 꺾인 채 버려지는 존재, 존재의 꽃. 화려한 문명의 뒤란에서 순장은 늘 이렇게 '진행형'입니다.

오늘의 조문객이 내일은 또 조문객을 맞기도 할 테지요.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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