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롱테일 법칙과 기초과학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상류층 20%가 국가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80/20'의 법칙을 찾아낸 후 소수 정예의 핵심 시장원리로서 또한 선택과 집중의 경영전략으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디지털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기에서 그동안 무시되었던 다수의 힘을 드러내는 '롱테일 (longtail) 법칙'이 새로운 대안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롱테일'은 2004년 이후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 시작한 키워드로 최근 이 개념의 창시자인 미국 인터넷 비즈니스 잡지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한국을 방문하며 국내에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롱테일 법칙'은 다수의 소액구매자의 매출이 상위 20%의 매출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역-파레토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판매량을 분석해보니, 안 팔리는 책도 모두 합치면 소수의 베스트셀러의 매출보다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른바 '롱테일 법칙'이 온라인 비즈니스의 새로운 전략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롱테일 경제학은 현재 위기에 처한 과학기술, 특히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의 전환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제한된 국가 자원 속에서 고속 경제성장을 위한 응용개발 연구와 국가 과학기술 로드맵에 따른 과도한 선택과 집중은 연구의 대형화·집단화 추세와 산업 투자비중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전략 아래 오랫동안 '쏠림'이 조장된 결과 대학에서의 기초과학 분야와 창의적 소규모 개인 연구는 '정글의 법칙' 속에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

한 예로 올해 과학재단의 핵심기초 연구비의 경우 2천여 명의 연구자가 신청했지만 그 중 87.2%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지방의 경우에는 연구비 신청 자체를 포기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부산 D 대학의 모 중견교수의 경우 1년에 SCI 논문을 6편씩 쓰는 연구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는 여전히 '하늘의 별따기'였다.

두뇌한국 (BK21)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도 해외에 수시로 보내면서, 막상 엄청난 투자를 통해 어렵게 배출된 고급 과학 인력은 실제 현장에서 손을 놓고 놀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의 대학 기초연구 지원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 풀뿌리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천500편의 SCI 논문을 창출해낸 것은 사뭇 눈물겨운 일이다.

세계 선진 각국의 과학기술 총역량과 국력 간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SCI 논문으로 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은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브릭스(BRICs)를 넘어 G7 선진국의 추격 가시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기초과학 지원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롱테일 법칙의 적용을 통한 '풀뿌리 기초과학 생태계 살리기'를 들 수 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선택과 집중에서 더 나아가 다수 개인연구자에 대한 저변 투자를 크게 확대하여 연구역량의 총합을 획기적으로 증대하고 기초과학 생태계를 피라미드형으로 복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응용개발 대비 기초분야의 정부지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과학계와 머리를 맞대고 현장의 과학자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 전환과 가치 극대화를 위한 국가적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

클린턴의 '창의적 자본주의'처럼 '롱테일법칙' 전략에 따른 기초과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적극적인 국가 지원은 과학자의 사기진작을 넘어 미래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 문제만큼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떠나 정부·교육계·과학계·언론이 모두 힘을 합쳐서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김승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아태이론물리센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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