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정원의 특징을 꼽으라면 단연 隱墻(은장)을 들 수 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보이지 않는 은장은 적의 기병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비롯됐다. 지상에 돌출된 담장이 아니라 垓字(해자)처럼 보통 사람이 건너뛰기 힘들 정도의 넓은 도랑을 파고 지하 수직면을 돌로 촘촘히 쌓은 담장이다. 은장은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庭園(정원)과 바깥의 시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고 정원에 대한 친숙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외부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담장 구실을 충실히 한 '보이지 않는 담장'인 것이다.
참여정부 5년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이겠지만 군사독재 시절과 이후 역대 정권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담장'이다. 민중과 권력을 가르는 물리적'정서적 담장이 많이 허물어졌고 무너져가고 있다. 제 식대로 설계한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일이 과거에 비해 엄청 힘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허물어진 것은 눈에 보이는 담장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장 즉 은장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결과 누구나 권력층과 세력집단의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건너가지 못하는 구조로 교묘하게 바뀌고 있다. 6'10 항쟁 이후 20년간 애써 온 담장 허물기의 효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不可侵(불가침)의 담장이 허물어지면서 또 다른 담장이 생긴 것이다. 정치권과 법조계, 재계, 학계, 언론, 노조 등 수많은 집단과 세력들은 예외없이 은장을 둘러쳐놓고 범접을 허용치 않고 있다. 지역주의나 집단이기주의, 코드식 인사, 진보-보수, 남북, 양극화 등 다양한 형태의 은장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사회적 통합과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된 것도 참여정부식 은장이다. 진보-수구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는 '코드'라는 이름으로 지난 5년간 우리 사회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은장 구실을 했다.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채 계속되는 정쟁으로 서민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참여정부는 출범과 함께 혁신과 시스템, 지역균형 발전을 핵심 화두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념과 코드라는 은장으로 인해 개혁은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 느낌이다. 개혁은 고사하고 은장만 더 공고히 만들어내고 말았다. 뒤는 보고 앞은 보지 못하는 참여정부의 미숙한 국정운영은 온 나라를 표류하게 만들었다. 담장을 허문 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진보를 외쳤을 뿐 진정한 진보는 한 치도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DJ정권 이후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선을 6개월여 앞둔 이 시점에서도 은장은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8월 대선후보 경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각 후보 진영이 은장을 튼튼히 구축하고 서로 물고 헐뜯는 이전투구에 여념이 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대통합을 부르짖으면서도 친노-반노로 갈려 꼴이 우습다. 표와 성분을 의식한 편가름만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잃어버린 20년'만 생산할 뿐이다.
네덜란드 작가 마티아스 반 복셀은 프랑스의 대표적 조경 건축가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베르사유 궁전의 가장 큰 약점으로 좌우대칭형 정원 구조를 꼽았다. 좌우대칭은 금방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지루한 구조의 약점을 덮어주는 것이 은장 기법이다. 하지만 기발함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도처에 만연해 있는 좌우대칭 구조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주의 구도도 모자라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터무니없는 관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즐거움은 없다.
은장을 대신할 기법이 절실한 시점이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복잡한 迷路(미로)의 매력을 살려야 한다. 미로에도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분명히 있다. 복잡다양해지는 우리 사회를 들고나는 것이 분명한 멋진 정원으로 만들려면 은장을 대신할 새 기법을 동원해야 한다. 복잡함 속에 잠재해 있는 단순함을 찾아내는 것이 진보의 비결은 아닐까.
徐 琮 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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