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이정의 독서 일기] 정본 백석 시집/ 백석

백석의 시는 우리 토속어들의 보고(寶庫)다. '소월이 우리말의 선율을 아름답게 가꾼 시인이고, 지용이 우리말을 조탁한 시인이라면, 백석은 우리말을 채집한 시인'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그의 시에는 선대들의 풍속과 체취를 고스란히 품고 있어 여읜 어미를 만난 듯 읽을수록 아련하고 애잔하다.

'당콩밥에 가지냉국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바가지꽃'은 박꽃이며, '박각시 주락시'는 박꽃의 꿀을 빨러 초저녁에 찾아오는 나비다. '돌우래'는 땅강아지의 평북 방언이고, '팟중이'는 메뚜기과의 곤충이다. 박꽃이 피는 저녁이면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멍석을 들고 뒷등성에 올라 바람을 쐰다. 잔콩 같은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하고 풀벌레 소리 들썩한데 이슬 축축한 풀밭엔 어느새 다림질감들이 하얗게 널려 있다.

명절날 부모를 따라 큰집으로 간 아이의 눈으로 쓴 '여우난골족'을 읽어보자.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가 나고', 저녁밥을 먹은 아이들은 밭마당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에서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다가 새벽닭이 울 때쯤 잠이 든다. 아침이면 '시누이 동새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에서 샛문틈으로 장지문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온다.

이 땅에서 우리보다 앞서 살다간 이들의 토종 씨앗 같은 언어들이 시 속에 알알이 박혀 있다. 오지항아리의 찹쌀탁주가 있고 싸릿닢이 깔린 토방이 있고 쌍심지에 불 밝히고 바느질하는 여인네가 있다. 늙은이와 더부살이 아이와 나그네와 붓장사와 땜쟁이와 강아지가 다함께 둘러앉아 모닥불을 쬐는 마을이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 이 땅에는 박꽃 피는 초가지붕도 없고 이슬에 녹여야 할 풀먹인 다림질감도 없다. 컴퓨터게임은 '빠싹'하니 알아도 조아질이니 호박떼기니 하는 놀이를 요즘 아이들이 알 턱도 없다. 농촌이나 도시나 사람은 살아도 함께 모닥불 쬐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은 더욱 없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애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하였으나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해마다 수백 종의 생물종이 지구에서 사라지듯 수많은 언어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 대신 영어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언어제국주의'가 도래하는 걸까. 언어의 단일화. 그것은 문화의 예속화와 정신의 사막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아닐지. 언어의 빈곤은 곧 정신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고유의 언어를 지키며 일상언어 또한 풍성하게 키워내는 일이 지금 그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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