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사랑은 증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랑의 앙금은 미련으로 남기도 하지만 증오라는 다른 얼굴로 바뀌기도 한다. 사랑이 강렬할수록 떠나간 사랑에 대한 독기어린 저주가 따라 붙는 아이러니. 때로 사랑과 증오는 비례관계라서 사랑할수록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이 커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고결한 감정 속에 숨어있는 이 파괴적 욕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아름다운 것을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원리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열정의 미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여기에 있다.

소설 원작으로도 유명한 '폭풍의 언덕'은 소진되지 않은 사랑의 침전물이 뼈 속 깊은 증오로 변질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애인으로 지내 온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사소한 오해와 신분 차이로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캐서린의 갈등을 변심으로 오해한 히스클리프는 남아 있는 사랑의 감정을 대를 이은 복수심으로 발현한다.

복수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히스클리프는 광기어린 증오심은 죽은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로 잔인한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부재는 오히려 그의 복수심을 자극할 뿐이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이란 이토록 잔혹하고 잔인한 데가 있다.

제니퍼 챔버스 린치 감독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는 소유할 수 없는 여자에 대한 파괴적 욕망의 또 다른 극한을 보여준다.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를 놀리듯 이 남자의 진심을 무시하던 여자는 어느 날 사고를 당하게 된다. 실력있는 외과의사인 남자는 여자의 사지를 절단해 자신의 집 안에 가둬둔다. 이 후,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준다기 보다 자신이 당했던 고통만큼을 돌려주고자 한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혹은 변심한 여자에 대한 복수심은 '사랑'에 대한 평범한 기대를 가진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사랑의 깊은 속내 중 하나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 증오는 처분되지 않은 감정으로 인해 가열된다. 복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증오가 무너뜨리는 대상이 실은 스스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증오가 파괴하는 것은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는 대가로 자기 자신을 요구한다. 증오심은 쾌감을 키우는 뼈와 살이 아니라 자멸을 가속화하는 독으로 내면화된다. 캐서린의 유령에 시달리는 히스클리프, 여자를 괴롭히지만 결국 스스로 더 큰 아픔을 겪는 남자의 모습이 그렇다.

'폭풍의 언덕'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에는 도덕이나 윤리적 질서 너머에 있는 사랑이 그려져 있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사랑의 음울한 이면이 이 모순적 충동 속에 융해되어 있는 셈이다. 자기애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은 사랑의 대가를 요구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나르시시즘은 늘 그 이상을 돌려받기 원한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아무리 받아도 부족한 이상심리 아닐까? 증오로 뒤바뀐 사랑에 만족이 있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대를 객관적 타자로 상정한 사랑은 끝없이 외로운 여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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