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임동규의 '자신감 회복기'

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하지만 자신감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를 잘 만나기도 해야겠지만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능력이 자신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잠재된 기량까지 표출된다.

화려함보다는 정확성을 선택해 2006년 선발 로테이션의 한축을 구축한 임동규는 신인들에겐 귀감이 될 영리함과 근성으로 자신감을 얻은 케이스.

임동규는 광주상고(현 동성고) 재학 시절 대붕기 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받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2차 5번 지명을 받았으나 동국대로 진학했고 졸업 후 계약금 5천만 원에 입단했으나 크게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입단한 2003년 두 경기에 출장해 1이닝씩 2이닝을 던졌지만 한화 이글스의 김태균, 이영우에게 연속타자 홈런을 맞았고 이후 내내 2군에 머물러 있었다.

2004년 2군 탈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프로야구의 광저우 레오파드 팀에 파견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김응용 감독과 친분이 있던 광저우 감독의 요청으로 가게 된 것인데 임동규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도 들었다.

고개를 떨구며 찾은 중국. 그러나 막상 중국에서 마운드에 오르고 보니 경기를 치를수록 자신감이 늘어갔다. 중국 프로야구 수준이 다소 낮은 편이라 기량이 한 수 아래인 타자들과의 대결에서 오히려 집중력이 강해졌고 수읽기를 할 여유도 갖게 됐다.

무엇보다 상대 타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 초구를 던지면서 타자의 습성을 파악하는 요령도 생겼다.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어서 타자의 스탠스나 스윙 궤적, 스윙 스피드를 빠르게 인지하고 해답을 찾아내려고 애쓴 덕분에 커브의 다양한 각도를 이용해 범타를 유도하는 요령이나 포크볼로 위기를 타개하는 완급조절의 구사능력이 자연스럽게 향상되었다. 3개월간 6승을 거둘 정도로 등판이 잦았고 임동규의 활약으로 광저우는 꼴찌에서 단숨에 1위로 도약했고 임동규는 팀의 에이스가 됐다.

파견 근무(?)는 3개월 만에 끝났지만 임동규는 자신감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귀국 후 내내 2군에 있었으나 중국에서의 경험을 2군 경기에 적용해 경기 운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했다. 비록 잦은 변화구 구사 때문에 평균 시속 140km대 초반(최고 구속 145km)에 이르던 입단 초 구속이 130km 후반대로 떨어졌지만 실전 감각은 훨씬 좋아져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참고 기다린 끝에 2005년 시즌 드디어 등판 기회가 왔다. 프로야구 무대를 뒤흔든 병역비리 파문으로 투수진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 힘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임동규는 정곡을 찌르는 피칭으로 코칭스태프의 신임을 쌓아 나갔다.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메이저리그 투수 매덕스를 본 따 '임덕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스스로 새로운 성공시대를 열어 나간 것이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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