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일차적으로는 음악·미술·공연·문학 등의 예술 활동을 주로 지칭한다. 철학이나 역사학 어문학 같은 인문학도 문화라는 말로 싸안을 수 있고, 나아가서 공학이나 수학, 그 밖의 기초 과학 역시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범위를 사람이 모여 사는 양태로 넓히게 되면, 공공질서의 준수 정도나 아파트 같은 공동 거주지에서의 생활양식도 문화라는 말을 붙이지 못할 바 없다. 칸트는 국가가 성립하는 이유는 도덕과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라 하였지만, 하나의 민족이 정해진 땅 위에서 생존을 영위한 결과 얻게 되는 꽃 같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한, 어떤 결과물을 문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모여 살았던 역사가 일천한 민족에게 깊고 높은 문화가 있기 어렵고, 무력의 힘으로 넓은 강토를 지배한 민족이라고 하여서 무력에 정비례하는 높은 수준의 문화가 수반되었다는 사례도 별로 없다. 한반도에 모여 사는 우리 민족을 이름 지어 부르기를 한민족이라 한다.
지금 일시적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정치와 경제의 체제가 다르다고 하여 문화의 근본까지 달라진 것은 아직 아닌 듯하다. 우리 한민족의 문화는 세계의 어떤 문화와 비교하여 보아도 결코 뒷자리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높고 깊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교 철학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이라는 나라도 있다. 청교도 이념으로 구성된 미국이 나타난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도 약 400년 뒤이다. 중국 땅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나자 이제 이 지구 위에서 유일한 문명국가는 우리밖에 없다는 조선중화사상이 영·정조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경영학의 분야에서도 문화라는 말을 쓴다. 회사에서 기업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년도 넘는다. 경영학에서는 기업문화를 '공유가치'(Shared Value)라고도 한다. 어떤 회사의 구성원이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업의 영속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삼는다.
은행들이 해당 기업에 자금을 대출할 때 기업문화를 내부적 판단 자료로 삼기도 한다. 기업문화가 창조적이며 불굴의 정신을 지니고 있으면 그 기업은 항상 창조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불황이나 혹독한 경쟁에서도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문화가 검소하고 질박하면 아무리 가격 경쟁이 심해도 그 기업은 원가를 경쟁회사보다 더 낮추어서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은 그 토대가 기업문화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업문화가 튼튼하게 정립되어 있는 회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기업에서 문화가 회사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이유는 기업이 새로운 경영 환경에 직면하여 더 이상 낡은 업무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새로운 업무방법을 만들어주는 토양이 바로 그 기업의 문화인 까닭이다. 현행의 시스템이 붕괴되었을 때,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근거가 바로 기업문화라는 말이다.
기업에서 문화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우수한 경영자는 규정과 제도, 업무관행에 대한 혁신 작업을 수행하고 난 뒤 반드시 기업문화 속에 새로운 변화가 착근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기업문화는 경영자의 최후의 경영 과제이다.
그렇다면 한 나라에서의 문화의 기능 역시 이와 같다 하여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둘러싼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변하고 나라 안에서의 구성원들의 생각도 늘 변한다. 이러한 때에 낡은 법과 제도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새로운 대내외의 환경에 맞는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할 때에 나라의 문화가 기능하게 된다. 나라의 문화가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구성원들의 가치가 공유되어 있는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새로운 법과 제도,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일은 더욱 쉬워진다. 말하자면, 정치·경제·법·제도 이런 것들은 문화라는 하부구조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힘이 세다. 본질적으로 힘이 센 것이고, 여기에 더하여 튼튼한 문화, 즉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드는 일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땅 위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 창조에 종사하고 있는 문화인들이 이 글을 읽고 자긍심을 더 굳게 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김연신(한국선박운용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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