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공간도 숨죽인 그곳으로, 나를 비우기 위해 떠난다.
하지만 비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음만큼 쉽지 않다.
무언가를 비우려면 일단 용감해야 한다. 과감하기도 해야 한다. 비운 후 공허함을 버티기 위해 희망과 긍정도 준비해둬야 한다. 알고 보면 비우는 것이 채우기 위해 열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난한 것이다. 매일같이 찾아드는 걱정과 피곤도 비울 걸 비우지 못한 집착에서 기인한다는 의견에 누구도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 주 '어서오이소' 팀은 비움의 여행을 떠난다. 격정의 시대가 준 상처 입은 과거를 거쳐 지금은 모든 것을 비우고 인고하는 곳, 아픔과 굴곡을 영원히 보듬기 위한 아늑함을 채워두고 기다리는 곳들을 찾아가 봤다. 흐르는 시간, 움직이는 공간을 꽉 붙들어 놓은 듯한 그곳에서 진정한 '비움'이란 무엇인지 느껴보길 권한다.
◆한티 순교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 자리한 한티 성지. 과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교우들이 몸을 숨겼던 곳이다. 끝내 추적당하여 사살당하기도 하고 처형을 당하기도 한 곳이다. 깊은 산골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듯한 모양새가 그들이 왜 이곳에 숨어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4m 높이의 커다란 십자가 앞에 있는 묘역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태순(베드로) 등 33기의 순교자 묘가 있고, 그 윗길에는 마을 곳곳에서 발견된 유해들을 따라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메고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을 이어놓았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길을 따라 걷노라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 길을 걸었던 예수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우고 버렸던 그들의 순결함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에게 한번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현재의 자신을 곱씹어 보기를 권해본다. 하찮은 일에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는 일상 속의 보통사람들에게 커다란 자극제이자 촉매제가 될 것이다.
◆가실성당
왜관 IC에서 대구 방향으로 이동, 왜관산업단지에 끝까지 들어가다 보면 가실성당의 이정표가 보인다. 1894년 9월경에 설립된 경상북도 지역 초기 천주교회다. 조선 후기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끝난 뒤에도 경상도 지방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여서 몇몇 신부들이 지천면 등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계속 벌였던 곳이다.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영화 '신부수업'을 촬영하기도 한, 가실(佳室)이라는 이름만큼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곳이다.
붉은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성당과 잔디에 모셔놓은 성모상이 편안하면서 아늑해 보인다. 소박하고 인자한 인상의 독일인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성당 유리창에 새겨진 알록달록한 그림들과 벽장 속의 조그마한 조각상 하나하나들의 의미까지 상세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송림사
544년(진흥왕 5년) 진(陳)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이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돌담길을 따라 사찰에 들어서면 숙종 친필의 거대한 대웅전 현판과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벽돌탑인 오층 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소원을 빌며 전탑 주위에서 탑돌이를 한 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면 옆쪽에 비껴선 명부전으로 눈을 돌려 보라. 명부전은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법당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이 죽은 이의 영혼을 다스리고 생전의 행동을 심판하여 상벌을 주는 곳도 이곳의 일부이다. 명부전 주변에는 지옥도의 내용이 그림으로 빙 둘러져 그 무게감을 더한다.
"모든 진실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러니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다. 서로 옳다며 매일같이 싸우는 우리 삶이 얼마나 소모적입니까? "
문화해설사가 던진 물음에 모두 동조한다는 듯이 여행객들이 크게 박수를 친다.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헤매던 수도승이 우여곡절 끝에 진리와 도를 깨치는 삶의 역정을 그린 주변의 그림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 사람들도 보인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놓치고 있는 어떤 소중한 것들을 생각해내려는 노력일 것이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송림사를 방문하면 사찰과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을 매우 풍부하고 흥미진진하게 전해들을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와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그들도 분명 꿈이 있었을 것이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다짐하면서도 모두가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전장으로 나갔을 것이다."
기념관 안에 전시된 각종 박격포와 로켓포, 갖가지 전쟁 노획물들 사이에 누워 있는 누런 플라스틱 숟가락들을 보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그들이 살고자 노력했던가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기념관은 1981년에 개관했다. 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6·25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낙동강 방어선과 바로 이어지는 이곳은 남쪽에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지노선이었고 북쪽에겐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고지였다. 이 전투의 상황에 따라 전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남북 모두가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할 수 없이 치열히 싸웠을 것이다. 화석처럼 고스란히 남아 줄지어 있는 전투기와 소총, 장갑차들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그마한 울림을 남긴다.
생생하게 숨쉬는 역사, 기념관 속에 정지한 채로 미라처럼 보존되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아픈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묵상하는 것도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주머니 팁
칠곡 동명면 곰탕집 곰탕 7천 원/ 꼬리곰탕 1만 원
구미 금오산국립공원 주변 한정식 2인분 1만 2천 원/ 삼계탕 9천 원
구미 금오산 주변 숙박 모텔 3만~5만 원 선
아침 북어국 6천 원대
구미 한정식당 정식 5천 원대
▷경험자
장화숙(56·서울 서대문구)
경북 테마여행에 두 번째로 참석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산책 나오는 기분이 꽤 좋다. 특히 이번 코스는 천주교 신자로서 나에게 의미 있는 코스였던 것 같다. 이번엔 남편과 왔고 다음 번엔 딸과 함께 울릉도 코스에 가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용길(53·서울 양천구)
경북 테마 관광코스를 일곱 번 정도 참가한 것 같다. 처음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마냥 좋았는데 아무래도 여러 번 오다 보니 부족한 부분도 많이 눈에 띈다. 특히 테마관광 코스가 체계적이지 못하다. 내륙과 해양을 적절하게 배합해서 배치하지 못해 지겨운 느낌이 든다. 매번 비슷한 산과 비슷한 사찰을 그냥 나열해 놓은 것 같다. 좀 더 코스를 세심하게 짰으면 좋겠다고 건의하고 싶다.
김국희 (53·수원 )
불교 신자라 그런지 사찰을 방문했던 게 좋았다. 성지나 성당 또한 같은 종교인으로서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간다. 문화유산해설사분들의 안내가 내실 있게 진행된 것 같아 역사 탐방의 의미도 있었다.
이영운(58·서울 송파구)
일정이 좀 덜 빡빡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이든 사람한테는 편하고 좋긴 한데 젊은 사람들한테는 잘 모르겠다. 그냥 공기 좋은 곳에서 조용히 산책하고 쉬었다 가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오면 좋을 듯하다.
구미·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군위·이희대기자 hdlee@msnet.co.kr 김희정기자
* 이번 주 여행코스 : 다부동 전적기념관-송림사-한티 순교성지-구도자 구상 시인 문학관-가실성당 답사-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구미시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도리사
* '어서오이소' 다음(23, 24일) 코스는 '군위 삼국유사 집필지와 도예체험'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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