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이 울상입니다. 아파트 출입구 화단에 노숙자들처럼 고개를 꺾고 섰습니다. 수국 사이로 동백나무 서너 그루도 피다가 만 꽃송이를 땅바닥에 팽개쳐 두고 멀뚱히 섰습니다. 떨어진 꽃송이가 마치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구겨서 버린 색종이 뭉치 같습니다. 며칠 사이, 화단을 점령한 잡초들이 경계석 밖으로까지 고개를 내밉니다. 관리실 할아버지가 떠난 뒤로 제일 먼저 꽃과 나무들이 주저앉았습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일하는 분들을 내보내고 무인경비시스템을 설치하자는 주장은 진작부터 있었습니다. 관리비 청구서가 날아들 때마다 그 내미는 손이 너무 크고 또 청구액의 대부분이 이분들의 월급과 퇴직적립금이라는데 대해 떠다니던 불평이, 어느 날 대낮에 일어난 옆 동의 도난사건을 계기로 이분들의 근무 태도를 규탄하는 내용들과 뒤섞여 아주머니들의 수다 방송을 타더니, 급기야는 무인경비시스템 설치의 가부를 묻는 회람지가 날아들었습니다.
회람지를 받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눈을 마주치는, 우리 라인의 관리실 할아버지 얼굴부터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양영용 할아버지. 이름자에 가득 들어 있는 동그라미처럼, 동그란 안경을 끼고 동글동글 눈웃음을 누구에게나 동동 띄워 건네던 할아버지였습니다.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면 어느새 달려와 어깨를 나눠주시던, 시장 갔다 오는 길에 과일 몇 개 건네 드리면 황송하리만치 허리를 굽혀 고마워하시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꽃을 좋아해 아파트 출입구 주변에다 봄이면 보랏빛 수국 잔치를,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국화꽃 축제를 열어 벌 나비까지 불러 모으시던, 그리고 가끔은 좁은 관리실 의자에 쪼그리고 새우잠에 빠져 도둑걸음으로 관리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안으로 숨어들던 제 등 뒤에서 고달픈 숨소리 뒤척이시던,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회람지의 찬성란 네모 칸에 미리 들어와 있었습니다.
무인경비시스템 설치 이후, 아파트 출입구 주변은 보육원 뒷마당처럼 적막해졌습니다. 7층에 사시는 할머니는 번호를 누르는 방법을 연방 잊어버리시는지 볼 때마다 유리문 앞에 주저앉아 계십니다. 과자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할아버지 발아래 날아와 종종거리던 비둘기들도 발길을 끊었습니다. 불량한 바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빈 관리실 잠긴 창문을 흔들어보다 사라지는 것이 목격되기도 합니다. 비밀스런 작전을 수행하듯 동전 크기의 비밀 카드로 치르르르 유리문을 열고 드나들 때마다, 문 밖으로 난 길이 혹시나 어느 낯선 세상의 뒷골목이나 외계의 블랙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치기도 합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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