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 포럼] 갑부의 연설과 한국 문학

세계 최고 갑부이며 최대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최근 하버드대 졸업식장에서 연설을 했다. "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특권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을 던진 그는 무엇보다도 "'세상의 심각한 불평등'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택해 이에 관한 전문가가 되라고 충고했다.

또한 그는 매년 수백만 어린이가 굶어죽는 현실에 대해 "市場(시장)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정부도 지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갈파하고, 휴머니즘의 세계관으로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장했다.

좀 엉뚱하게도 그의 연설은 필자에게 199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遺棄(유기)하는 경향의 한국소설에 대한 문제점을 새삼 생각하게 했다. 세계 최고 갑부가 인류의 심각한 현실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전망을 고뇌하는데, 작가들은 향락적 일탈의 밀실을 훔쳐보거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해학적 포즈로 가볍게 웃겨주거나, 관념적인 개인의 내면풍경을 세계의 전부처럼 들여다보거나…. 이것은 갑부의 영혼이 작가의 영혼을 대신하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일어나기 어려운 현상이라 하겠다.

빌 게이츠의 '굶어죽는 어린이들'은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그 실상을 참담한 탈북자 행렬이 폭로한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 떠도는 탈북 디아스포라는 작가의 날카롭고 따뜻한 시선을 기다린다. 남한으로 들어왔으나 모든 제도와 일상과 가치관이 낯설어서 또 다른 곤혹을 헤쳐 나가는 새터민에게도 작가의 시선은 다가가야 한다.

북한의 굶는 어린이와 餓死者(아사자)·탈북자·새터민을 소설의 문제적 인물로 선택하여 그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하려는 일은 먼저 북한 작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런 북한 소설을 읽을 수 없다. 북한의 어떤 책에도 그런 소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북한의 지하작가, 지하소설을 기대한다.

지하로 잠복하여 현실의 파편을 모으고 꿰맞춰 시대적 진실에 도달하려는 반체제 작가와 소설이 과연 북한에도 존재할 것인가? 이 질문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스탈린 러시아'의 지하에서 창작되어 '흐루시초프 러시아'에서 최고 권력의 승인을 받아 비로소 햇빛을 보았던, 거대한 억압체제의 급소를 조그만 펜으로 깊숙이 찔렀던 소설.

소설은 작가정신의 산물이라는 평범한 진리의 기준으로 예측할 때, 북한에 지하소설이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거나 없어 보인다. 우상숭배적 세뇌, 전체주의적 억압, 폐쇄적 주체사상의 세계관이라는 삼중의 그물망에 갇힌 채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해온 자기검열의 타성이 반체제적 지하작가의 존립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서면, 북한체제에 대한 소설적 대응도 남한 작가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한 젊은 소설의 주류적 경향은 남한의 현실조차 유기하는 실정이다. 북한이 엉망이라고 해서 남한이 저절로 품격을 갖춘 사회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자유분방한 그만큼의 윤리적 타락을 포함해 양극화와 실업사태, 정치적 후진성 등 겹겹의 심각한 질곡을 안고 있다. 남한 현실을 배제하는 그들에게 어찌 북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하겠는가?

소설을 리얼리즘의 눈으로 읽어내지 않으려 했던,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도 '문학의 자율성이 획득한 최대의 성과는 현실의 부정적 드러냄이며, 그 부정적 드러냄을 통해서 사회는 어떤 것이 그 사회에 결핍되어 있으며, 어떤 것이 그 사회의 꿈인가를 역으로 인식한다.'고 진술했다.

세계 최고 갑부가 富(부)의 눈으로 현실의 딜레마를 직시하며 새로운 전망을 탐구하거늘, 작가들이 소설의 눈에서 현실을 배제하는 것은 문학적 영혼이 고갈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한국소설이 현실을 유기하는 경향, 여기에 '한국문학 위기론'의 한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대환(작가·계간 '아시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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