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1980~90년대 명절을 맞은 근로자들이 고향을 갈 때면 회사에 제출하는 서약서 내용이다.
"구미 가면 일자리 있다."는 말도 유행했었다. 그만큼 구미 근로자들이 인기 있었고, 구미가 전국 최대 일터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 구미에선 기업들이 문을 닫고, 공장 가동률은 떨어지며, 근로자들은 떠나면서 사상 최대의 위기상황이란 소리가 높다. 반면에 공단의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으로, 내일이면 한 번 더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섞인 분석도 적지 않다. 구미의 명암을 진단해본다.
우울한 오늘
◆폐업, 실직, 해외 이전 =2000년 대하합섬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이후 2004년 금강화섬, 최근엔 한국합섬과 HK에 대한 파산 결정이 내려져 섬유산업에는 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2005년 코오롱 구미공장이 대규모 인력을 정리해고했고, 두산전자 구미공장도 떠났다. 또 오리온전기가 지난해 문을 닫는 등 실직 사태가 잇따랐다. 지난해 LG필립스LCD 파주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지역 중소기업들의 파주 투자가 이어지고 있고, 삼성전자는 중저가 휴대전화 생산을 위해 베트남에 대형 공장 설립을 계획 중이다.
또 중국, 베트남, 인도 등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기업도 잇따르고 있다. 섬유, 범용 전자부품, 브라운관 업계에서 특히 심각하다.
구미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구미에 본사를 둔 업체들 중 98개가 중국에, 15개는 동남아에 진출했다. 중국에선 226여 도시에, 동남아에선 베트남 34건, 인도네시아 50건, 태국 13건 등 100여 군데나 된다.
현격히 저렴한 생산비용을 보고 가는 것이지만 구미공단으로선 생산 및 고용 감소가 불가피하다. 실제로 구미공단 모 업체는 생산기지가 있는 중국엔 사원 500여 명을 두고 있지만 구미 본사 직원은 채 10명도 안 된다.
이 탓에 실직이 심각해졌다. 구미공단의 근로자 수는 2005년 8만여 명에서 현재 7만 6천 명 수준으로 줄었다. 특히 작년 4월 이후 3천500여 명의 근로자가 무더기로 감소한 것으로 구미상의는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합섬과 HK 사태 여파로 적어도 올 연말까지 1만여 명의 실직사태가 빚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반면 실업급여 신규 수급은 늘어 대구지방노동청 구미고용안정센터에 따르면 올 들어 실업급여 신규 수급자는 3천576명으로 지난해 3천248명에 비해 10% 정도 늘었다.
◆가동률·생산·고용 감소 =한국산업단지공단 중부지역본부가 조사한 구미공단 961개 입주업체 중 769개 업체의 4월 말 가동률은 79.1%로 전년 동월보다 5.4%포인트 하락했다. 생산은 3조 3천800억 원으로 10.2%포인트나 감소했다. 고용 역시 7만 4천633명으로 6.2%포인트 감소했다.
덩달아 고용 전망도 비관적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1천564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올해 전국 고용전망지수는 1/4분기 103, 2분기 105로 고용시장에 봄바람이 불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구미지역 133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고용전망지수는 1분기 93, 2분기 92로 전국 평균보다 낮은 것은 물론 지난해 2분기 이후 4분기 연속 기준치(100) 이하를 기록했다.
◆인구증가세 주춤, 아파트 미분양 급증 =이런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인구 증가세도 지난달 뚝 떨어졌다.
5월 말 현재 38만 8천869명인 구미의 5월 증가 인구는 62명(작년 5월 1천826명)에 불과했다. 지난 4월 1천404명이 증가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셈. 지난해 5월 38만 명 시대를 연 뒤 매월 평균 1천여 명씩 불어 40만 시대 도래를 예고했던 게 꿈이 된 셈이다.
2004년 5천14명, 2005년 4천799명, 지난해 4천876명 등 3년 동안 연평균 4천896명씩 태어났던 신생아도 급감해 올 들어 1월 442명, 2월 416명, 3월 473명, 4월 439명, 5월 398명으로 뚝 떨어졌다.
아파트 미분양도 급증했다. 한때 "구미에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분양은 걱정 없다."는 말이 공공연했으나 5월 말 현재 13개 아파트 7천990가구 중 1천873가구가 미분양됐다. 여기에 1만 4천500세대가 건축 중이며, 5천 세대 건축이 추진되고 있어 앞으로 미분양물량이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희망의 내일
◆R&D 단지로의 도약 =구미공단은 연구개발(R&D)단지로 탈바꿈하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이 지난 3월 착공한 구미기술센터가 2009년 2월 문을 열면 R&D 인력이 2천 명에서 5천 명으로 늘어 지역대학의 연구인력 채용 확대는 물론 대구·경북 모바일 산업의 신성장 동력이 될 전망이다.
또 지난달 구미 4공단에 개원한 구미 디지털전자정보기술단지는 디스플레이·모바일 관련 중소기업의 R&D 지원 강화로 구미공단의 기술력 보강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1일부터 구미역에 일일 4회 정차하는 KTX는 국내외 기업 바이어들과 업체 임직원들의 교통 편익을 높여 구미공단의 기능과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중소기업의 약진 =최근엔 탄탄한 기술력으로 대기업 못지않게 성장하는 중소기업도 급격히 늘었다. 대기업 및 수출 의존도가 높아 대내외 여건에 민감한 구미공단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허리 보강'책이라며 공단은 반기고 있다.
구미상의에 따르면 대기업 그늘에서 벗어나 자체 브랜드 출시, 수출, 자체 연구소 보유 등으로 대기업 부럽지 않게 탄탄한 기반을 갖춘 중소기업은 300여 개소. 이들 중 일부는 수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효리폰'과 '권상우폰' 등 대박 휴대전화의 힌지(여닫이 기능 핵심 부품) 제조 공급업체로 매출 1천억 원을 훌쩍 넘겨 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KH바텍, '뷰피아' 란 자체 브랜드로 디지털 TV 완제품 시장에 진출해 지난해 매출 830억 원을 달성한 ㈜인디텍, PDP·LCD 정밀화학 소재업체로 내년 수출 호조를 기대하고 있는 ㈜이그잭스, 지난해 매출 627억 원에 나노 기능성 소재 부품 연구개발로 급성장을 예고하고 있는 ㈜휘닉스PDE, ㈜오성전자, 유엔아이 등은 탄탄한 기술력으로 약진하고 있는데 상당수는 코스닥 등록을 준비 중이다.
㈜참테크, ㈜성일텔레콤 등 10여 업체는 이미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들이다.
구미상의 김정기 조사진흥팀 과장은 "1천700여 개 제조업체가 소재한 구미지역은 삼성, LG 등 대기업 양극화와 수출 의존도 65%에 달하는 구조여서 대기업 움직임, 환율·유가 변화에 민감하다. 경쟁력 있는 공단이 되기 위해선 매출 1조 원의 대기업 1개보단 매출 1천억 원의 중소기업 10개가 있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자체 브랜드 출시 등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들을 대폭 지원, 공단의 허리를 보강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의 R&D 토양 마련 기관인 구미전자산업진흥원의 홍순목 경영관리실장은 "중소기업의 기술력 보강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500여 개 기술지원 대상 기업들을 위해 애로 기술 해결, 장비 인력 지원 등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벤처까지 가세=여기에 벤처업체들도 적잖게 늘고 있다. 공장 용지 임차업체들이 부쩍 늘고 있는 게 그 반증이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중부지역본부에 따르면 구미 1·2·3단지에서 공장 용지 임차업을 하는 업체는 320여 개소로 2000년을 전후해 배 가까이 늘었다. 이들 임차업체 상당수는 가동 중이던 공장을 축소, 여분의 부지를 임차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100~300평 등 소규모 공장 부지를 필요로 하는 벤처기업 등이 늘어난 덕분이다.
구미·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이창희기자 lch888@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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