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스타토크] 탤런트 황범식

탤런트 황범식(61). 이름만 들어서는 그가 누군지 잘 모른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절 아시겠어요?"하면서 자신을 낮췄던 그였다. 수백여편의 드라마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한 게 배우인생 37년 이력의 전부이지만 배우가 좋아 그 오랜 세월 홀연히 배우라는 광대의 자리를 지켜낸 황범식 씨를 만났다.

"얼굴 봐도 모르실텐데요."라고 말했던 그였지만 워낙 오랜 세월 시청자들과 함께 해서인지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꽤 됐다. 고속철에서 내려서는 그를 보면서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오고, 사인 종이를 내미는 사람도 있다. 배우로 살아온 세월만큼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웃아저씨 같은가보다. 내 민 종이에 흔적 하나도 정성스럽게 남기는 그였다. 이름과 날짜만 달랑 쓰는게 아니라 시 한편 수준의 글을 적어나갔다.

인근 식당에 앉자 그는 배우가 된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배우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게 해 준 사람은 가정교사. "당시에는 은행원이 되는게 최고의 직업이었거든요. 그런에 어느날 가정교사가 저에게 '넌 배우가 되면 잘 할 거야'라고 말하더군요. 배우가 되겠다고 국문과에 원서를 냈다 한번 낙방하고, 이듬해 발을 들여놓은 곳이 바로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술대학)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배우가 제 길이 된거죠."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그는, 한마디 말에도 구수한 입장단으로 리듬을 타며 듣는 사람도 정겨워질 정도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연애담도 그의 얼굴 만큼이나 순수했다. "집사람을 처음 만난 게 23살때 연극 오셀로에서 이아고 역을 맡았던 때였어요. 버스에서 한창 대본연습을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눈에 확 들어오는거야. 하늘이 내려 준 인연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연습 마지막날 버스에서 내리면서 첫날 첫 공연 초대권 2장을 손에 쥐어줬지요."

그날 공연에 오면 꼭 결혼하리라 혼자서만 마음을 먹고 분장실에서 수십 번도 더 몰래 객석을 쳐다봤다고 했다. "공연시작 10분전에 들어와서는 자리에 앉더라고. 가슴이 막 떨리는 게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거 있죠. 공연 마지막 날 청혼을 했고 결혼에 골인했죠." 순수한 버스 안 로맨스가 소박하게 성공해서 1남1녀의 가정도 꾸렸다.

그는 1970년도에 KBS 남산 9기 공채탤런트로 방송사에 발을 들여놨다. 탤런트 주연, 백윤식, 장항선씨 등이 방송국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동기들이었다. 당시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던 '한운사'선생이 쓰고 김연진 PD가 연출한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에 출연하면서 그의 조'단역 인생은 시작됐다.

"배우의 크기를 인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비우고 37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하니까 이게 천직이 된 셈입니다. 배역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단, 주어진 역할이 작더라도 배우로서의 욕심은 많은 편입니다. 황범식 만이 표현할 수 있는 등장인물을 연구하는 것이 제 즐거움이지요. 이 나이에 스타가 되겠어요, 더 유명해지겠습니까. 지금 이것도 만족합니다. 늘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사실, 배우로서 좋은 역할에 대한 욕심이 그한테도 왜 없었을까. 그러나 그는 주어진 역할마다 최선을 다 해 가며 더 나은 연기자가 되고자 하는 배우로서의 본분에만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입맛에 맞는 좋은 역할은 없어도 좋은 배우는 있는 법이니까.

환갑이 넘어선 나이에도 그의 활동 영역은 다양하다. 젊은 사람도 완주하기 힘든 마라톤도 서 너 차례 뛰었고, 강원도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성과와 홍보활동을 펼쳤다. "인생은 도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웃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은 큰 즐거움인거고요." 그의 얼굴에 정직한 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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