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의 사채를 주무르는 '큰손'은 베일에 가려있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자신을 철저하게 숨긴다. 뭉칫돈이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직접 나서지 않고 몇 손을 거쳐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본사 기획탐사팀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대구지역 '전주(錢主)'들의 모습을 추적했다.
◆'큰손'은 누구?
대구의 사채시장에서 하루에 현금 50억 원 이상을 동원할 수 있는 '큰손'은 5명 정도다. 이들은 20년 안팎의 경력에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업계를 지배해왔다. 사채업이 살벌한 전쟁터라고 하지만 이들은 돈을 떼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40대 후반의 A씨는 업계에서 '전설적 인물'로 통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출해 술집 웨이터, 공사판 잡부, 노름판 심부름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A씨의 한 지인은 "젊을 때 그 사람 별명이 '상독종'이었다. 노름판에서 사채를 놓으면 떼이기 마련인데 100% 수금을 했다. 한번은 이자 5만 원을 받으려고 채무자 집 앞에서 돗자리 깔고 일주일을 기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드라마 '쩐의 전쟁'에 나오는 박신양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A씨가 6, 7년 전만 해도 현금 2천억 원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현재 A씨는 사채업 외에 요식업, 숙박업, 부동산 등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골프장도 짓고 있다.
50대 후반의 여성 B씨는 '로스(loss) 불패'로 불린다. 단 한 차례도 돈을 떼인 적이 없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0여 년 전 남편이 고물상을 해 모은 2억 원으로 사채놀이를 시작, 현재는 몇 시간 안에 현금 50, 60억 원은 거뜬히 동원할 수 있다고 한다.
B씨는 채무자의 인상만 보고도 '떼먹고 달아날' 사람인지를 단번에 알 정도로 여성 특유의 '직감'과 '섬세함'을 활용한다. B씨와 거래를 한 업계 관계자는 "다른 사채업자와는 달리 어떤 담보나 물권을 요구하지 않고 채무자의 신용도와 됨됨이만 보고 빌려주는데도 돈을 떼인 적이 없다."고 했다.
60대 초반의 C씨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백전노장'이다. 사채로 큰 돈을 벌고는 사업을 벌이다 망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건설 관계업을 하고 있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아 또다시 사채업자로 나섰다.
◆큰손들의 사업 행태는?
'큰손'들의 주고객은 건설업자, 부동산 관계자, 중소기업인 등이다. 한 건설시행사 관계자는 "3년 전 마지막 남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큰손에게 30여억 원을 빌렸는데 열흘 만에 4억 원의 이자를 요구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3~10일간의 급전이 필요한 중소기업에는 기계, 자재 등을 담보로 잡고 빌려주는 경우가 많다.
큰손들은 지난해부터는 건설시행사에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사업 전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만 해도 '큰손'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만 챙겼지만 이제는 '투자'개념으로 돈을 굴리는 경향이 많다. 한 부동산업자는 "지난해 미분양 빌라를 10여 채 구입하기 위해 큰손에게 20여억 원을 빌렸고 3개월 후에 이를 되팔아 수익금의 25%를 이자로 줬다."고 말했다. 한 사채업자는 얼마 전 시세차익을 남기기 위해 미분양 아파트 50채를 한꺼번에 구입해 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큰손들은 시야가 확 트인 대로변 건물 2, 3층을 사무실로 쓰는 게 보통이다. 사무실에서 대로를 내려다보면 돈 빌리려는 사람의 면면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채업자 김모(44) 씨는 "멀리서 보면 사채업자와 돈 빌리려는 사람이 고급차에 동승해 올 때가 가끔 있다. 사채업자가 악성 채무자에게 다른 사채사무실을 소개해주고 돈을 빌려 자신에게 갚게 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다."며 "업자끼리 채무를 떠넘기려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20대 후반 노름방에서 시작해 지난 10여 년간 큰돈을 굴리던 이모(48) 씨는 얼마 전 사업가로 변신했다. 돈을 떼이지 않으려면 '독종'이 돼야 하는데 먹고 먹히는 업계에서 더 이상 마음 졸여가며 살기 싫다고 했다. "사채시장은 드라마처럼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드는데 성공한 큰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될 겁니다."
기획탐사팀=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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