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한산성'이 인기를 끄는 것은, 치욕을 감당하면서도 살아내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으리라는 쓸쓸한 공명 때문이겠지만, 작가의 탁월한 말의 성찰 또한 읽는 맛을 떠받드는데 있지 싶다.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갇힌 바람 앞 등불 신세에서도 대책 없는 말싸움으로 지새다 치욕을 맞는 허망함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또 하나 매력은 흥미롭게도 오늘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를 배제하면 말의 성찰들은 영락없이 오늘의 정치현실을 빗대고 있다. 온데를 들쑤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대통령, 그를 맹렬히 추종하는 측근세력, 아귀다툼의 정치판과 대선 정국을 조롱하는 것 같다. 이들의 모질고 거친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고 떼로 뒤엉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게 한다. 대통령만 해도 기어이 누군가의 허파를 뒤집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입만 열면 사방팔방으로 튄다.
충직한 측근들은 그런 대통령을 '솔직성' 때문이라고 편드는 모양이다. 정제와 가공을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가당치 않은 옹호다. 발가벗는다고 솔직한 것은 아니다. 가릴 것은 가리고 치장이 필요하면 곱게 차리는 게 세상에 대한 예의다. 천둥벌거숭이를 보고 성숙한 인격체라고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가 저잣거리에 뒹구는 거친 말들을 생짜로 입에 담는 것은 솔직함보다 차라리 편안함에서 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몸에 밴 것보다 더 착착 달라붙는 말이 없다고 보는 생각이다. 생리적으로 고상한 말은 안 맞는다고 거부하는 잠재의식의 발로다. 그렇게 보면 그의 성장환경을 살피고 이해해야 하겠으나, 척박하다고 가시덤불만 무성한 것은 아니다. 가난을 이고 살지만 네팔에는 욕이란 게 없다하지 않는가.
대통령은 언젠가 "말씨 바꾸면 좋겠는데 이제 늦었다. 못 바꾸고 그렇게 4년이 지났다"고 했다. 또 "(대통령으로서)준비 못 한 게 뭐가 있느냐. 단 하나 말을 고상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번 더 시켜주면 (말을) 확실하게 하겠다"고 했다. 농담이라도 큰일 날 소리다. 설령 저속한 말투는 고칠는지 몰라도, 말끝을 앙칼지도록 벼려 후벼파는 버릇은 갈 데 없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거슬리면 누구도 비켜가지 않고 성하도록 두지 않는, 독설의 정치가 생리이기 때문이다. 입은 사고의 출구다. 말씨만 고친다고 달라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속에 꽉 찬 가스가 빠져야 입도 향기로워지는 법이다.
대통령 친위조직인 참여정부 평가포럼은 홈페이지에 '왈왈왈'코너란 걸 설치했다. 앞으로 '한나라당 왈' '이명박 왈' '박근혜 왈'로 나누어 비판하겠다는 것인데, 어떤 동물 짖는 소리를 연상케 하려는 심보다. '공자 왈' '맹자 왈' 수준으로 받들려 했을 리는 만무다. 이걸 만들어놓고 낄낄댔을 모습이 섬뜩하다. 하나같이 비비꼬였다. 정치적 도의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도 갖추지 못한 짓거리다.
대선 레이스는 시작종이 울리기 전부터 '대가리를 치켜든' 말들로 악머구리 끓듯 하고 있다. 여고 야고 독기 품은 서로의 입 앞에서는 어제의 동지도 없다. 나만 잘 났다. 남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기필코 상대의 급소를 치려는 강포한 말들만 어느새 선거판을 장악했다. 멀쩡하던 입도 더러워졌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는 자들이다. 벌써부터 저 지경으로 밑천을 드러내고 있으니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토론회는 세 번을 거쳤지만 귀에 남는 게 없다. 후보들의 말은 깊지도 넓지도 않다. 서로 상처내기에 머리를 짜고, 오늘 말로 어제 말을 덮는 게 전부다. 품격 높은 정치는 말이 생명이다. 평균적 교양에도 못 미치는 정치인들은 아예 입을 봉해놓는 입법조치가 어떨까.
김성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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