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농약도 비료도 필요 없는 '태평농사'

농사는 봄이 아니라 가을에 시작해야 한다. 벼는 무논에 모를 심을 게 아니라 밭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논 갈지 말고, 밭 갈지 말고, 농약 치지 말고, 비료 주지 말아야 한다. 벼 수확한 땅에 볏짚을 그대로 두어야 하고, 보리 수확한 땅에 보릿짚 그대로 둬야 한다. 산에 나무와 풀이 살 듯 그대로 살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해와 달, 비와 흙이 농사를 지어준다.

이른바 '태평농법'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태평농 이영문씨가 34년 전부터 지어온 농사법이다. 저래가지고 농사가 되겠나 의심스럽다. 농업 전문가들이나 30년 농사꾼 귀에는 도무지 씨도 먹히지 않을 농법이다. 이영문씨가 말하는 '태평농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태평농법'을 이하 '태평'으로 쓴다.)

◇ 농약도 비료도 필요 없는 농사

농약 없이 잡풀을 어떻게 막고, 비료 없이 어떻게 영양분을 공급할까. 태평은 가을에 벼를 수확하기에 앞서 밀이나 보리씨를 뿌린다. 그 다음 벼를 수확하고 볏짚은 그대로 들판에 둔다. 볏짚은 파종해둔 보리나 밀 씨앗을 새들로부터 지켜주고 잡풀이 자라는 것을 막아준다. 볏짚을 덮어두면 제 아무리 질긴 뚝새풀이라도 살지 못한다. 설령 잡초가 돋았다고 해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이듬해 여름이 오면 보리나 밀을 거두기 전에 볍씨를 뿌린다. 그리고 밀이나 보리를 거두고 밀짚이나 보릿짚은 그대로 둔다. 역시 새를 막고 잡초를 막는다. 게다가 종자 위에 덮어주는 짚은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미생물은 짚을 먹고, 벼나 보리는 미생물의 분비물이나 시체를 영양분으로 한다. 그러니 농약도 비료도 필요 없어진다. 볏짚을 덮어주지 않고 봄에 농사를 지으려면 잡풀이 무성하니 제초제를 쳐야하고, 땅에 영양분이 없으니 비료를 뿌려야 한다.

◇ "농사는 가을에 시작하는 것"

태평은 가을에 농사를 시작한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논밭의 잡초와 해충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봄에 모든 동식물이 자생력을 갖춘 상태에서 곡식을 심으면 잡초를 이겨내기 어렵다. 잡초가 많아 곡식이 비틀거리면 농부들은 결국 제초제를 뿌리고 비료를 쳐야 한다. 농약 치고 비료주기 시작하면 '관행농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서리가 내리고 잡초가 사라진 땅에 씨앗을 뿌리고 볏짚을 덮어두면 곡식은 충분히 자생력을 갖춘 상태에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태평이 가을에 농사를 시작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가을 빈 땅에 보리나 밀을 파종해두면 겨우내 들판은 온갖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한다. 겨울 동안 비워둔 흙과 보리나 밀을 심어둔 흙은 이듬해 봄에 전혀 다르다. 게다가 보리나 밀이 자리를 잡고 나면 잡초가 자라지 못한다. 봄에 논갈이나 제초제가 필요 없어진다.

◇ 씨앗을 심지말고 뿌려라.

태평은 씨앗을 심지 않고 뿌린다. 흙으로 덮어 생매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버려두면 씨앗은 스스로 건강한 뿌리를 내려 든든하게 자란다.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끄덕 없다.

자연의 열매나 씨앗은 그냥 땅에 떨어져 스스로 뿌리내리고 산다. 그러나 '관행농법'에서는 씨앗을 땅에 파묻는다. 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식물을 그렇게 생매장한다. 태평은 매장을 금지한다. 벼나 보리 밀의 경우 땅에 뿌리면 그만이고 콩이나 다른 식물은 홈을 파서 넣어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흙 위에 떨어져 스스로 뿌리내린 식물은 태풍에도 견딜 만큼 튼튼한 뿌리를 내린다.

일반적인 '관행농법'에서는 볍씨를 뿌리기 전에 소독을 위해 농약물에 담근다. 그리고 무논에 뿌린다. 물에 담긴 볍씨는 호흡을 위해 싹을 먼저 틔운다. 그런 다음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뿌리가 약하다. 발아 때부터 잘못 됐기 때문에 제 스스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래서 비료도 쳐주어야 한다. 뿌리가 깊지 않으니 바람이 불면 쉽게 쓰러지고 병해충이 닥치면 금방 마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살충제 대신 물엿을

흔히 밭작물을 몇 년 계속해서 심으면 연작피해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식물의 궁합을 잘 맞추면 그런 염려를 크게 덜 수 있다. 도시인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거나 소규모 텃밭에서 키울 때 해충이나 잡초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채소의 궁합을 맞춰가며 기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살충제 살균제,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다.

이영문씨는 꼭 써야 한다면 살균제나 살충제 대신 물엿을 쓰라고 한다. 물엿을 물과 혼합에 벌레가 많은 작물에 뿌리는 것이다. 분무기로 뿜어서 나올 정도의 농도면 된다. 끈적끈적한 물엿이 벌레들의 발과 날개를 묶어 죽인다. 또한 뿜어낸 물엿의 물이 증발하면서 잎에 코팅이 돼 작은 해충이 파고들지 못한다. 다만 개미가 많은 곳이라면 조심해야 한다.

식물의 궁합을 이용하면 잡초를 충분히 막을 수 있지만, 처음 농사를 시작하기 전 땅에 잡초가 너무 많다면 뽑아내지 말고 10% 소금물을 뿌려 고사시키면 된다.

◇ 6월 파종하면 태풍에 강하다

태평이 볍씨를 뿌리는 시기는 대충 6월이다. 더 늦어도 상관없다. 벼는 아열대 식물에 속한다. 아열대 기후 조건이 비슷하게 갖춰줬을 때가 6월 중순이다. 이때 뿌리면 가을이 충분히 익은 다음 수확하게 되고 일부러 말릴 필요가 없다. 현재 '관행농법'은 너무 일찍 수확하기 때문에 건조과정을 따로 거쳐야 한다. 벼 알곡에 수분이 30%까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수확하기 때문에 건조하지 않으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벼가 한창 자라는 계절은 여름이다. 여름은 밤이 짧고 낮이 길다. 벼는 낮이 길면 자라고, 낮이 짧아지면 알곡 맺을 준비를 한다. 그래서 너무 일찍 심은 벼는 여름을 보내는 동안 웃자라기 십상이다. 더구나 일찍 모내기한 논의 벼는 일찍 이삭을 내고 고개 숙일 준비를 한다. 이때 태풍이 닥치면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늦게 씨앗을 뿌린 태평논의 벼는 아직 젊고 줄기가 싱싱해 태풍에도 강하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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