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스캔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사랑은 언어게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타자의 말을 외국어 듣듯이 받아들여 이해하는 성숙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서로의 언어와 행동을 외국에서 온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인 듯 배려할 때 사랑이라는 게임은 완성된다는 뜻이다.

게임과 가장 먼 것 같지만 실상 사랑만큼 잔혹한 게임은 없다. 인상적인 스틸컷으로 주목받은 영화 '싱글즈'의 카피에서는 "사랑은 게임, 시작하긴 쉽고, 끝내기는 어렵다(love is game, easy to start, hard to finish)"라는 문구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사랑의 한 속성일 뿐 게임이 사랑을 완성시켜주지는 못한다.

사랑이 게임이지만 게임이 사랑일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재용 감독의 2003년작 '스캔들:남녀상열지사'는 그런 점에서 게임과도 같은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은 게임처럼 시작하지만 게임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깊고 원대한 세계라는 속성 말이다.

스캔들이라는 제목 곁에 '남녀상열지사'라는 부제로 한국적 상황을 설정해 낸 이 작품은 실상 역사가 길다. '발몽',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위험한 관계'가 모두 같은 원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 말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쇼데를로 라 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178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 전, 정략 결혼 후 위선적 냉혈한이 되어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는 후작부인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를 냉정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파락호 조원과 조씨부인의 추문으로 귀결된 '스캔들'은 우선 고색창연한 전통의상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겹겹이 덧댄 20폭 치마, 숨통이 조일만큼 갑갑한 의상이 숨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추잡한 성적 욕망이다. 성적 욕망은 애초부터 불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욕망이 정치적 계산이나 타자를 향한 파괴적 본능과 접속할 때 성욕은 불온하고 위험한 무엇으로 전도된다. 조씨부인의 욕망 역시 그렇다. 그녀는 사촌 지간인 조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실상 그를 차지하고 싶은 소유욕과 다를 바 없다. 자신에게 마음 한 편이 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조씨 부인은 위험천만한 내기를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그 고을에서 정숙하기로 소문난 숙부인을 유혹해 철저히 유린하라는 조건이었다.

조씨 부인이나 조원이 보여주는 기괴한 사랑 게임. 하지만, 누구나 연애를 할 때쯤 겪게 되는 심리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가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주는 정열 이상 되돌려 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애타하는 이상으로 상대가 나에게 종속되기를 바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계산과 전략이 세워지고 허물어진다.

사랑과 연애의 복잡미묘한 모순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순간 목숨을 잃게되는 조원의 형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스스로 선택한 사랑을 갖게 되었다고 믿는 조원은 게임같은 사랑과 결별하고 진짜 스스로와 만나기 위해 숙부인을 찾아 간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랑의 해피 엔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랑의 해피 엔딩은 오히려 환상에 가깝게 받아들여질 지경이다.

지젝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이러한 사랑을 '궁정식 사랑'이라 이름붙였다. 사랑의 파괴적 본능과 그 계산과 전략이, 위선적 정략 결혼과 혼외정사가 난무한 16세기 궁정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이 논리는 시작된다. 왜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 스스로를 더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으로 뒤바뀌는 것일까?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남녀상열지사'는 그런 점에서 언제 다시 봐도 좋은 작품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