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구상(具常)은 용모가 귀공자다웠다. 뛰어난 문학적 감성에다 성품이 유순했다. 그는 대구 피란시절 문단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문인들에게 그는 넉넉한 언덕이었다. '구상'이란 이름 두 자를 쓴 사인 한 장이면 도원동 유곽을 무상으로 드나들 만큼 명망과 신용을 갖춘 인물이었다. 구상이 향촌동에 모습을 드러내면 거리의 색깔부터 달라졌다.
시인 구상이 술집을 드나들며 호기만 부렸던 것은 아니다. 남로당 관련 사건으로 사형위기에 몰린 향토시인 이호우를 백방으로 손을 써 구해낸 사람이기도 했다. 효성여대(현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를 양성했고, 민주항쟁의 불씨를 살린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냈고, 전쟁에 짓밟힌 인간성을 증언한 시집 '초토의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무명의 화가 이중섭과 대구와 왜관에서 동고동락했다. 무명의 이중섭이 천재로 거듭난 데는 구상의 이해와 후원이 있었다.
구상은 6.25 전쟁으로 황량한 대구 거리에 낭만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었다. 후에 작가 윤장근씨는 구상을 두고 "시인의 문학적 인간적 본질은 '문학과 인간의 합일'에 있었다."고 했다. 덧붙여 "궁핍한 시절에 문화의 터전을 일궜던 위대한 문인"이라고 했다.
당시 대구 향촌동에 어디 시인 구상만 있었겠는가? 백기만, 마해송, 박두진, 이윤수, 유치환, 이호우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향촌동을 풍미했다. 가히 한국전쟁 피란시절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 향촌동은 한국문단의 중심이자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숱한 문인묵객들은 향촌동 거리의 술집과 다방을 드나들며 세월과 삶과 작품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여성 문인이 귀하던 시절 '향촌동의 꽃'으로 불리던 서정희 시인은 시인 정석모, 무용가 옥파일, 언론인 남욱 등과 로망스가 있었다. 육신의 한계와 시류의 비정에 홀로 울다가 떠난 그녀가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고 절규한 곳도 향촌동이었다.
대구문단 스캔들의 원조격인 이호우 시인은 남로당계 여인을 가까이 했다가 '거물 빨갱이'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겨울 동성로의 동문다방 앞 빙판 길에 쓰려져 비명에 떠나던 그 날도 문학소녀들과 함께 있었다. 이를 두고 이윤수 시인은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데 이호우는 한번만 만나면 일이 된다."며 이호우 시인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문인들은 대구 향촌동에서 대낮부터 술에 취해 걸었고, 한잔 술에 겨워 노래하고 시를 읊조렸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고, 노을이 비끼면 시에 젖어 걸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술집이 있었다. 세월을 따라 문인들은 떠났고, 지금 향촌동에는 그 기억마저 잊혀지고 있다. 이 책 '향촌동 소야곡'은 한국문학의 중심이었던 향촌동 골목을 구석구석 비추고, 그 골목의 술집과 다방을 무시로 드나들던 문인들의 삶과 사랑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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