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23)동네 목욕탕

좁은 탕 옹기종기 등 '박박'…국수 같은 때 끝없이 '줄줄'

목욕탕에 얽힌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요즘에는 목욕탕에서 살다시피하는 사람이 꽤 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목욕탕 가는 일은 큰 연중행사였다. 추석, 설날 등 명절을 앞두고 찾는 곳이었다. 좁은 탕에 옹기종기 앉아 등을 밀면 국수 같은 때가 끝도 없이 나왔고,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기 싫어 서성거리다 엉덩짝을 맞은 기억이 아득하다. 그때는 샤워기 대신에 바가지로 물을 떠 몸에 끼얹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놓인 큼직한 돌에 박박 문질러 각질을 벗겨냈다.

이제 목욕탕은 때를 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식 및 피로회복을 위해 찾는 곳이 됐다. 시설도 깔끔하고 편리해졌다. 넓고 호화로워졌지만 예전 같은 친근함이나 구수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옛날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는 목욕탕은 없을까.

■제주도 모슬포의 목욕탕

취재팀이 이 목욕탕을 발견한 것은 지난달 말이었다. 제주도에서 '일본의 군사시설'(제20회·6월 1일자 24면)을 취재하면서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 옆 여관에서 하룻밤 묵은 후 인근 목욕탕을 찾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나지막한 단층 건물에 남·여탕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다 카운터(수부)가 남녀 탈의실 앞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목욕탕 탈의실 앞에 얇은 커튼만 있어 손님이 '치솔'을 달라고 하면 주인 할머니가 커튼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치솔을 건네줬다. 건물에 간판도 붙어 있지 않아 주인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신흥탕'이라고 했다. 욕탕 안은 10평 남짓한 자그마한 크기였지만 갖출 것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온탕, 냉탕도 있고 샤워기도 여럿 있었다. 온탕은 어른 두 명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작았다. 천장이 뚫려 있고 두껍지 않은 벽 하나를 사이에 뒀기 때문에 건너편 여탕에서 말하는 소리가 모두 들렸다. 한 할아버지는 여탕쪽 벽을 가리키며 "30년 전에는 벽이 그리 높지 않아 짓궂은 남자들이 깨끔발을 하면 여탕 풍경을 볼 수 있었다."며 웃었다.

주인 송치정(76) 할머니는 "이 목욕탕은 34년 전(1972년)에 세워진 건물인데 일제강점기부터 창고 비슷한 목욕탕이 있었다."며 "지은 지 2년 된 목욕탕을 인수해 지금까지 운영해왔는데 그런대로 손님이 많다."고 했다. 대정읍에는 시설좋은 목욕탕이 여럿 있지만 물 좋고 오랫동안 다니던 정 때문에 아직도 찾아오는 동네분들이 많다고 했다.

송 할머니의 어머니인 이연 할머니는 102세나 됐는데도 가끔씩 카운터에서 교대로 일을 하고 있다. 송 할머니는 "어머니가 매일 새벽에 목욕을 하기 때문인지 아직도 정정하시고 아픈 곳도 없으시다."면서도 "몇 달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돈을 제대로 세지 못하셔서 걱정"이라고 했다. 3년 전만 해도 목욕탕 앞이 바닷가였는데 매립하는 바람에 동네 가운데 자리잡은 것처럼 됐다고 한다. 그때 찾아 왔더라면 더욱 운치가 있지 않았을까.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령군 고령읍에도 옛 모습을 갖고 있는 소박한 목욕탕이 2개 있다. 쾌빈동 대광탕은 2층으로 돼 있고 내부는 리모델링해 깨끗했다. 1층 앞 카운터 앞에는 낡고 오래된 요금표가 걸려 있어 정감이 갔다. 22년 전인 1985년에 지은 목욕탕이다. 주인 신동우(72) 할아버지는 "목욕탕을 하면 장부를 만들 필요도 없고 외상도 없어 밥을 굶지 않는다."고 했다. 고령읍내에 '대궐'같은 최신시설의 목욕탕이 많이 있지만 물이 좋기 때문에 멀리서도 찾아온다고 했다.

몇 십m 떨어져 있는 곳에 또하나의 목욕탕이 있다. 지은 지 40년 된 화성탕이었다. 탕안은 7, 8평 정도 될까. 어른 1, 2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욕탕과 돌리는 수도꼭지가 전부였다. 지금까지도 장작을 때 보일러를 돌리고 있었다. 목욕탕 옆에는 헌 집에서 뜯어낸 목재가 높이 쌓여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기름 보일러로 바꾸려고 했는데 유류파동이 나기도 하고 기름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 근데 요즘 기름값이 너무 비싸 차라리 나무 때기를 잘 한 것 같다."고 했다.

경남 의령군 의령읍의 미림탕도 좋았다. 욕탕에 들어가니 바가지로 물을 떠 몸에 꺼얹을 수 있는 미니 욕탕도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샤워기보다 훨씬 편리하다고 해 예전 그대로 놓아두었다고 한다. 취재를 하면서 자그마한 욕탕에 혼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절로 흥감이 났다. 개인탕처럼 욕탕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함께 쓰는 큰 목욕탕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주인 곽갑연(76) 할머니에게 27년간 목욕탕을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여탕을 훔쳐보려는 남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남자들이 여탕 창문에 매달려 훔쳐보기에 철조망으로 막아놨더니 다음날 다 뜯어놨더라. 그래서 창문을 알루미늄 새시로 했는데 돌로 창문을 깨어놓곤 했지. 다 예전 얘기지. 요즘에는 농촌에 할머니만 있는데 누가 훔쳐보겠어."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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