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의 미술사랑은 독립투사들의 애국심 못지 않게 각별하고 단호했다. 1906년 서울 종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 많던 재산을 우리 미술품을 사는데 죄다 쏟아넣었다. 스승인 위창 오세창으로부터 미술품에 눈을 뜨게 된 간송은 일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비싼 값이라도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말곤 했다.
1935년 어느 날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의 가게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옥빛 맑은 하늘 가득 하얀 꽃구름이 흐르고 수십 마리의 학이 날갯짓하는 아름다운 고려상감청자 한 점이 놓여 있었다. "2만 원 내시오!" 마에다는 아무리 돈이 있는 조선 청년이라지만 그 값에는 설마 살 수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거금을 제시하고는 간송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 1천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조선 청년은 "2만 원에 사겠소."라며 미소를 지었다. 식민지의 애숭이가 도저히 그 많은 돈을 주고 사지는 못하리라 싶었던 마에다는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했다. 고려청자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은 이렇게 간송 전형필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한 쪽은 마에다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까지 나섰으나 엄청난 가격 때문에 포기했고, 일본 굴지의 수집가 무라카미가 간송을 찾아와 4만 원을 주겠다며 유혹했다. "이 청자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이 매병을 원금에 드리지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간송의 한마디에 무라카미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간송의 이러한 미술품 구입 사례는 극단적인 한 예에 불과하다. 기와집 일곱 채 값으로 산 청화백자철채문병(보물 241호), 기와집 다섯 채 값으로 산 훈민정음 원본(국보 70호)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또 한번은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변호사로 있던 개스비가 소장품을 일괄 처분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 있는 5천석지기 전답을 모두 팔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 10만 원(기와집 50채 값)으로 사들인 고려청자 10점 중 훗날 2점은 국보로, 2점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요즈음 미술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지만, 지금 유입되는 돈은 간송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미술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투기판으로 전락할 수도 있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품은 결과적으로야 자산이겠지만 결코 돈으로 유혹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병도(화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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