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정치는 선택의 미학?

10년 전 정치부 기자 시절 백면서생이던 노무현 대통령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운영하던 대구 수성구의 횟집에서였다.

소주 몇 잔이 돌아가자 이 전 수석은 "노 (전)의원을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심중의 말을 끄집어냈다. 노 대통령은 소주잔을 쥔 채 묵묵히 이 전 수석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황당무계한 얘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부산시장, 국회의원 선거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신 노무현 씨와 대통령 자리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 이 전 수석이 횟집을 팔아 노 대통령 선거자금을 댔다느니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노무현 씨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됐고 이강철 씨는 '정권의 실세'로 불리게 됐다. 기자는 그 장면을 떠올리면 '이 전 수석은 충분하게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는 '선택의 미학'이라고 하는데 이 전 수석의 판단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노무현 씨를 대통령으로 올렸다면 한동안 영화(?)를 누릴 만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국가대사를 떠나 人之常情(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뿐 아니다. '선택의 미학'은 그 아래쪽으로 연쇄 파급됐다. 현정권 출범 이후 수많은 지역 인사들이 중앙무대로 불려 올라갔다. 그 숫자가 50명 안팎이라고 하고 100명 가까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어쨌든 대구 사람들이 청와대, 정부, 각종 위원회, 공기업 등에서 대거 일자리를 얻었다. 공무원 직급으로 보면 7급 하위직부터 중앙부처 차관보급인 1급, 장관급까지 다양하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이 전 수석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전 수석이 5차례나 총선에 출마하면서 신세를 졌던 운동권 선후배, 지인은 물론이고 친분 있는 계성고·경북대 동문도 많다.

일부에서는 이 전 수석이 지역 실업자 구제와 신분 업그레이드에 큰 공헌을 했다고 비꼬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인사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이 전 수석을 비롯해 상당수는 대구·경북지역과 정부와의 연결통로 역할을 상당부분 했다. 대부분 지역에 가족을 남겨두고 올라갔거나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때부터 서울로 올라가 고향과 거리를 두고 사는 이들과는 다른 부류들이다. 통로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대구·경북 지방자치단체, 기관 등에서 이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볼 때 노 대통령은 '코드 인사'라는 말을 들었을 망정,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은했고 충분하게 의리를 지켰다.

이제 '政治無常(정치무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 올해 말쯤이면 이들의 효용가치는 거의 끝나고 새로운 인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요즘 '제2의 이강철'을 꿈꾸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누구는 누구에게 올인했고, 누구는 누구 쪽으로 옮겨갔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한나라당 유력 후보보다는 활동여지가 넓은 범여권후보 진영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신념이나 가치관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 높지 않은 확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넣는 '묻지마 투자'가 엿보인다.

연말이면 누군가 정권의 실세가 될 것이고 새 대통령에게서 받아낼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의리와 뚝심이 노 대통령을 상당부분 망쳤듯, 이런 정치 풍토라면 다음 대통령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것 같아 두렵다. '선택의 미학'은 이강철 전 수석 한 명으로 족하지 않을까.

박병선 기획탐사팀장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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