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향기에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사람도 새도 나무들도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달입니다. 범어 숲 꿀밤나무들이 제 그늘 넓히느라 서로 허공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 손끝마다 불을 켜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경쟁심 부채질하느라 바람은 이 나무 저 나무 쫒아 다니기 바쁩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제 본능과 의무 지키느라 싱싱하고 빛나는 눈빛이 새삼 아름답게 보입니다. 정지용의 '슬픈 汽車 '라는 시의 한 구절에선 '우리들의 汽車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소 걸어가듯 걸어간단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유월소는 여름소란 뜻으로 유월이 그만큼 여유 있는 계절이란 뜻이 아닐까요.
사월 보릿고개도 모심기도 대강 끝내고 저 풋풋한 힘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유월항쟁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하니 이십 년 전 그 당시의 젊음이 그리워집니다. 살아있음의 큰 축복은 무엇보다 소리가 아닐까요. 모든 생물 의사소통의 통로여서 서로의 벽을 없애고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가까운 길일 것입니다.
바다 속에도 소리 터널이 있어 미국이나 뉴질랜드에 있는 암컷고래가 짝이 그립거나 급히 부르짖는 소리가 동해 해안에 있는 수컷고래에 전달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분명 저 숲에도 나무는 나무들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새들은 저들끼리 주고받는 소리통로가 뚫려 있을 것입니다.
무료한 날 등산길 벤치에 앉아 있으면 소란스런 소리들이 사랑을 찾는 소리인지 다투는 소리인지 햇살이 그 사정 알아보려 기웃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벽 예불의 범종 소리나 징소리처럼 독자를 징하게 울려줄 수 있는 소리를 찾아 길 떠난 구도자가 갖추어야 할 어떤 자세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마음도 징이고 그 징을 소리 나게 하는 징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보면 뜨겁거나 차가운 수많은 바람의 징채들이 우리 가슴 두드리기도 하지요. 즉 봄눈 이기려는 매화 향기나 눈을 온몸에 이고 선 겨울나무의 목 꺾는 울음소리 또는 낙엽까지 휩쓸어가려는 높새바람의 춤이, 가장 가까운 가족 간 주고받는 말이나 욕설이, 슬쩍 혼자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징채가 되어 누군가를 기쁘게 하거나 가슴앓이 하도록 울려줄 수 있지요.
그런 아픔을 내면으로 꾹 참다가 씹고 씹어서 정말 참을 수 없도록 가슴이 미어질 때 그 때 울어야 감동을 주는 울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처럼 유월항쟁이나 4·19 또는 5·18도 개개인의 참았던 그런 소리를 모으고 모아 울린 함성이기에 온 국민의 마음통로를 열고 벽을 허물어뜨려 민주주의의 길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힘센 권력도 무너뜨리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로 화가는 그림으로 음악가는 리듬으로 정치가는 웅변으로 나무들은 바람의 힘을 빌려 온몸으로 춤추며 뭔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울음 대신 슬픔의 표현일 수도 있고 기쁨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통로가 잘 되어 있어도 장벽이 높아 서로 마음의 소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소리통로는 막혀 버릴 것입니다. 태평양을 건너 그 먼 곳에서도 상대방의 마음 알아들을 수 있는 고래들은 그 뜻을 알아듣기 위해 그만큼 순수하게 온 마음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겠지요.
유월의 향기로우면서도 따스한 저 바람처럼 가슴 속 박힌 가시들의 말 귀 기울여 듣고 녹여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보시이고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별일 아닌 울화들까지 남이 녹여주길 기다리기보다 시각장애인이나 고래들처럼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소리 내 스스로 찾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뜻 깊은 일 아닐까요?
우선 자신을 잘 다스려야 이웃의 비명에도 귀 기울일 여유가 있을 것이므로 서로 막힌 말씀의 통로 틔우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이 또 밤꽃 향기 몰려오는군요. 그 향기 징채에 여직 둔탁하기만 한 징일 뿐인 제 마음 맡겨 깊이 취해봅니다.
정 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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