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크기의 모래 알갱이는 강바닥을 거침없이 나뒹굴면서 강물을 정화한다. 강모래는 분해자, 생산자, 소비자들이 의존해 사는 수많은 물속 생물들의 거대한 삶터이다. 강모래의 그런 생태계 서비스 기능을 값으로 따지자면, 얼마나 될까?
모래가 없다면, 콘크리트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칠 때면 강모래는 확 뒤집혀 버린다. 모래가 모래일 뿐이지만, 썩은 모래, 덜 썩은 모래, 깨끗한 모래, 어느 것 할 것 없이 확 뒤집힌다.
싹 쓸어버려 비워진 강은 모래로 채워지고, 채워져 있는 모래 강은 비워진다. 태풍 덕택에 강 역사는 다시 시작되고, 또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무자비한 간섭을 삼간다면 더러운 강물은 늘 스스로 깨끗해질 수밖에 없다.
여성의 몸은 한 달에 한 번씩 홍수를 치른다. 생명의 잉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이다. 자연생태계 속의 江(강)도 주기적으로 홍수를 치른다. 그래야만 삼라만상의 기능과 구조가 정상으로 작동하고, 자연을 잉태한다.
태풍과 모래의 메커니즘이 온전하게 작동하지 않는 강은 수질 정화 비용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거액의 지출을 요구한다. 강은 물고기만이 갈증을 해소하는 공간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육상 생물의 70% 이상이 굽이굽이 흐르는 강에 의존한다는 생태학적 사실을 인용한다면, 감당해야 할 생태계 서비스 가치는 산술적으로 엄청날 것이다.
태풍은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태풍은 하늘의 용틀임이며 땅의 소통을 의미한다. 태풍은 하늘에서 깨어나 땅에서 잠든다. 태풍을 잠재우는 것은 흐르는 강뿐이다. 강은 어마어마한 태풍의 에너지를 수용하고 분산한다.
사통팔방으로 흐르는 도나우 강, 라인 강을 품에 안은 중부유럽에는 태풍이 없다. 거기다가 이들 강들은 머리맡에 해발 3,000m 급의 '유럽중앙알프스'라는 거대한 물동이(集水域)를 이고 있다. 그래서 일 년 내내 눈 녹은 물로 가득하고, 강이 곧 운하인 것이다.
한반도의 강은 일 년 내도록 줄곧 빈 땅이기도 하다. 태풍을 위해서, 그 태풍보다 규모가 작은 장마를 위해서이다. 그것이 한반도 강의 특징이요, 천년만년 이어져온 이 땅의 모습이다. 한반도의 기후를 다른 온대와 구별해서 특별히 '온대 몬순(monsoon)'이라고 부른다.
열대지역에서나 있을 법한 건기와 우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른 계절, 흐르는 계절, 넘치는 계절과 같은 '강의 계절'이 있다. 그 속에서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이 분화해왔던 것이다.
'생태'와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사탕발림으로 강에다가 물을 가두고, 운하처럼 콘크리트로 댐과 수중보를 만들고, 굽이굽이 흐르던 강을 直江化(직강화)하는 사업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위정자들의 세련된 greenwash(녹색세탁) 기술은 강의 생명성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성형수술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상흔은 크게 남는 법이다. 원상복구는 아예 불가능하다. 두렵고, 두려울 뿐이다!
인간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어떠한 강줄기도 태풍은 상관하지 않으며, 빗물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태풍의 에너지는 어디에선가 수용되고 분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론가 몰려가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표출되고 만다.
세금으로도 수재의연금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의 궤도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과거 2천여 년을 떠돌다가 겨우 되찾은 조국 땅을 지키고자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는 유대인처럼 우리는 한반도를 등지고 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겸손하지 못한 자연의 성형수술은 이 땅의 우리 자신과 자손들에게 엄청난 업보만을 남기고 만다.
그러나 원초적 겸손(humble)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휴먼 'human'을 상기하면서 그렇게 살기 위한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불타는 계절 가뭄이 있고, 침수의 계절 장마가 있고, 국토 대청소의 계절 태풍이 존재하는 가장 매력적인 온대의 땅 한반도! 이것이 한반도 자연이다. 생명의 기반인 이 땅은 예술과 문화의 무대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김종원(계명대 생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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