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루머의 전쟁

"한국에서 날씨 다음으로 가장 흔한 화제는 정치 성격을 띤 얘기와 잡담이었다." 100년 전(1908년)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의 대화 내용을 관찰해 온 '데일반 바스커크'라는 미국 출신 선교사가 한 말이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 관한 루머나 즐기고 너나없이 정치에 끼어들려고 한다'고 썼었다. 그 양반의 지적이 아니라도 백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사회는 어느 자리든 두 세 사람만 모이면 누구나 한두 마디 정치 얘기를 거들고 나서는 性情(성정)엔 변함이 없다. 대선 예비 후보가 74명이나 되는 것도 그렇다.

거기다가 대선 주자들에 대한 온갖 루머와 비방이 종횡무진 얽히고설켜 난무하자 '누가 되겠나'던 화두도 요즘은 '버틸 수 있겠나'로 갔다가 '어느 쪽이 암까마귀냐'로 바뀌고 있다. 음모와 루머 공작은 오래전부터 정치의 일부분이 돼왔다.

정략적 루머 조작의 고전적 예로는 네로황제의 기독교인 방화 루머 조작이나 칭키즈칸이 항상 공격전에 먼저 敵地(적지)에 첩자를 보내 병력수와 잔혹함을 과장하여 퍼뜨림으로써 미리 사기를 꺾고 공략한 것들을 꼽을 수 있다.

어느 시대나 그러한 루머 조작과 흑색선전은 선거판이 벌어지면 더 극성을 부린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 간의 루머 전쟁은 치열했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혼외정사로 흑인 아이를 낳았고 친구의 딸까지 건드렸다는 루머와 싸워야 했다. 클리블런드는 술만 마시면 자기 부인을 두들겨 패는 주정뱅이란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버젠은 출생이 庶子(서자) 출신이라는 루머로 곤욕을 치렀다.

지금 범여권과 현직 대통령, 경선 주자들 사이에 치고받는 루머들의 類型(유형)도 출생이나 여성 관계 등등 미국 선거판의 메뉴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격언에 '나쁜 비방은 비방한 사람과 비방을 당한 사람 그리고 비방을 듣고 전한 사람, 세 사람을 해치되 가장 해를 당하는 자는 비방을 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말은 한낱 도덕적 격언일 뿐 시장 바닥 정치판엔 거짓 루머도 퍼뜨리고 나면 그뿐이다. 루머를 퍼뜨리고 비방한 쪽보다 당사자가 더 다친다.

거짓 노래를 퍼뜨려 선화공주를 차지한 薯童(서동)이나 '누이가 임신했다'는 루머를 퍼뜨려 왕의 매형이 된 김유신의 삼국유사 이야기 같은 고전적 루머도 비방한 루머 조작자는 챙길 것 다 챙겼다. 오히려 루머가 진실인지 조작인지 미처 가려내 볼 여지도 없이 루머의 함정에 빠져들어 딸을 내쫓은 진평왕과 정말 임신했는지 자기 아이인지도 알아보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식 결혼을 해버린 김춘추가 루머의 희생자다.

정치판에 비방이 떠돌고 루머의 전쟁을 일으키는 건 그 재미 때문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도 '왕이 생명을 잃거나 나라(권력)를 뺏기게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전쟁에 의한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음모에 의한 것이 훨씬 많고 모든 음모들은 상류 권력 계급이나 왕과 간신들에 의해 계획된다'고 했다. 지금 대선 정국을 보면 마치 마키아벨리가 무덤에서 일어나 우릴 쏘아보며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李'朴'집권층 간의 검증싸움이 갈수록 서로서로 루머의 조작과 '보이지 않는 손의 음모'라고 비방하는 불신의 공방으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선거판에서 마키아벨리가 음모세력이라고 말한 상류 권력 계급과 왕과 간신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혼돈 속에도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에서는 반드시 경제를 살리는 제대로 된 정권 창출을 위해 유권자가 진평왕이나 김춘추처럼 어영부영 루머에 홀려다니다 신세 망치는 꼴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일반 바스커크'의 지적처럼 한국사람 성정대로 정치 루머는 감상하며 즐기되 눈과 귀를 바로 열고 상류 계급과 왕과 간신이 뒤엉킨 루머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낼 아군은 제대로 가려내자는 것이다.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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