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거처하던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당시 육군 소위인 안두희는 평소부터 김구와 안면이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이날 오전 11시 반 면회를 요청, 소지하고 있던 45구경 권총 4발을 발사하여 안면 복부 등에 치명상을 입혀 절명케 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평소에 존경하던 김구가 귀국 후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정치의 혼란을 조장하기 때문에 살해한 것이라고 암살 동기를 진술했다.
범인 안두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판결 3개월 후 징역 15년형으로 감형, 1950년 6·25 전쟁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됐다. 이후 이승만 자유당 정권하에서 군에 복귀, 중령까지 진급했다.
안두희가 백범 암살 1주일 전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사실 등으로 인해 배후에 대한 의혹이 일었지만 그 전모는 그가 1996년 10월 피살될 때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백범 김구의 죽음은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백범의 장례식은 국민들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로 국민장으로 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또한 그가 타계한 지 13년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66년 김기수 국내 최초 권투 세계타이틀 획득 ▶1977년 고리원자력발전1호기 최초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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