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유홍준 作 '열 번을 쓰는 일회용 면도기'

열 번을 쓰는 일회용 면도기

유홍준

일회용 면도기로 아홉 번째 턱수염을 미는 저녁

도대체 나는 왜 출근시간에 쫓겨

저녁에 미리 수염을 깎는가

한 번의 맹세로 충분한 사랑은 종종 애정을 확인하려 들고

한 번의 작성으로 대충 넘어가도 될 기안은

왜 자꾸 재검토 재작성을 요구하는가

한 번 부딪힌 문틀에 나는 왜 번번이 머리를 들이받는가

날 무딘 면도날이 따끔따끔 구레나룻을 잡아 뜯는 저녁

삐죽삐죽 피가 솟아오르는 턱주가리에 화장지를 뜯어 붙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면도란,

사랑의 맹세나 재검토해야 할 기안처럼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밀어야 하는 것

지혈이 될 때까지 지그시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것

골백번 립스틱을 발라도

여자는 제 입술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천만번 입술을 둘러싼 수염을 밀어도 사내는

아직도 무엇을 더 깎고 무엇을 더 쳐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빨간 립스틱 바른 입술과 말갛게 턱수염 민 입술이

포개지는 밤…… 한 번 더

사용하려고 나는 세면대 모서리에 면도기를 턴다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면도를 하는 걸까. 출근시간에 쫓겨 가면서 왜 한사코 수염을 미는 것일까. 여자들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립스틱을 바르는 것일까. 틈날 때마다 거울 들여다보며 왜 립스틱을 발라야 하는 걸까.

아무리 값비싼 립스틱을 발라도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지지 않고, 아무리 '턱주가리'를 밀고 또 밀어도 수염은 돋아나기 마련인데. 그런데 시인은 뭐라고 말하는가. 면도란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깎고 쳐내는 것, 지혈이 될 때까지 지그시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것. 그 면도의 힘이 고삐 없이 날뛰는 피의 충동을 억누르고 날마다 얌전히 넥타이를 매도록 하는 것인가. 그런가?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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