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예전 고단한 소아과 수련의 시절에 마치 무슨 대단한 주문이라도 되는 양, 늘 속으로 되뇌어보던 구절이다. 온 밤을 새우고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응급실 호출을 받았을 때, 그런데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는 가벼운 열 감기일 뿐인 아가를 만났을 때, 더더욱 호들갑스러운 보호자의 성화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이 불쑥 치솟아 오를 때에는 제법 든든한 의지처가 돼 주곤 했다. 특히 밤새 아기가 보챈다며 퉁퉁 부어 오른 얼굴로 제법 눈물까지 글썽이며 응급실을 찾아온 초보엄마를 맞닥뜨렸을 때, 정작 아기는 새록새록 편안한 얼굴로 곤한 잠을 자고 있을 때, 정말 웃을 수도, 함께 울어 줄 수도 없을 때에 그 주문을 떠올려 보노라면 제법 여유로워지기까지 했다. 밤낮이 바뀐 아기들의 생리현상과 간단한 대처 요령을 일러주면서, '필요시, 아기를 안고서 집과 응급실을 왕복하세요!' 라는 지극히 비의학적인 처방전을 손에 쥐어주며 비로소 같이 웃었던 기억도 새롭다.
수련을 마치고 근무하게 된 어느 중소도시의 종합병원 외래진료실에서의 해프닝을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웃음이 배어 나온다. 환절기인 탓에 그러잖아도 북새통인 진료실로 곱상하신 할머니가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끙끙거리면서 붙들고 들어오셨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느냐?"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다짜고짜 청진기만 한 번 가슴에 대어 달라신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노라니, 열없는 얼굴로 웃으면서 털어놓으시기를, "우리 집의 맏손자인데, 평소에는 그렇게 순하던 놈이 병원만 들어서면 이렇게 난리를 치네요. 그래서 오늘 내가 병원에 온 김에 어떻게 적응시키는 연습이라도 시킬까 해서 데리고 왔지요. 미안스럽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만 같아, 다소곳이 시키시는 대로 병원놀이를 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맞아, 이건 반할아버지쯤은 돼봐야 짐작이라도 하지, 고작 아빠 마음만 갖고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겠다.'라고 킥킥거리면서 말이다.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라고, 다시 한 번 가만히 읊어본다. 그리고는 이제 훌쩍 다 커버린 내 자식들을 떠올려 보며,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다.'는 그 시의 뒤 구절까지 챙겨본다. 그래, 그 설레던 첫 마음을 잊지 말고, 이제는 제 눈에 밟히는 제 새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곳의 아이들까지 챙겨볼 수 있는, 조금은 오지랖 넓은 아비이고 싶다고.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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