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가톨릭 성지⑪-칠곡 지천면 신나무골

대구천주교회 첫 본당 터…영남 신앙의 요람이자 오래된 미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 성지. 신나무골 성지는 늘 변함없는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이다. 동네 사람들이나 구교우 집안에서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신나무골에 천주교인의 발길이 닿은 것은 근 200년 전인 1815년 을해박해 직후이다. 그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외롭게 소리없이 날아든 믿음의 숨결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 둘 퍼져나가, 지역 천주교회사에 빠뜨릴 수 없이 소중한 사건과 인물들을 만들어갔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내일 역시 그렇게 신앙의 향기가 묻어나는 삶이 이어지리라 믿게 만드는 성지이다.

◈ 관광지화 되지 않은 순수한 성지

초기 경상도 천주교회사에서 은신 전교의 근거지로 영남 신앙의 교두보이자 순교성지인 신나무골은 늘 조용하다. 9월 순교자성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내 5개 대리구별 순회성지순례를 가는 때라면 모를까, 평소에 신나무골을 찾는 이들은 크게 많지 않다. 관광지처럼 북적이지 않고, 상업화되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기에 오히려 더 감사하게 되는 역설이 성립되는 성지가 바로 신나무골이다. 번잡한 세상, 속진에 물든 일상을 털고 세상과 맞설 용기를 얻고 싶은 이들은 조용히 자주 신나무골을 찾는다. 아카시아꽃으로 유명한 신동재 구길이든, 대구시 북구 칠곡에서 왜관으로 가는 새길을 택하든 차로 금방 다다르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 성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행정구역상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인 신나무골 성지는 오는 201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할 대구천주교 첫 본당터이자, 병인박해 때 숨진 순교자(이선이 엘리사벳)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곳이다.

◈ 약 200년 전, 순교자 가족이 뿌린 믿음의 씨앗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고, 순교자 집안에서 순교자가 난다. 경북 칠곡 신나무골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은 우리나라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 가족으로 구전되어온다. 충남 솔뫼에서 태어난 김종한은 부친(김진후)이 천주교를 믿다가 '무죄 순교'하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세상사의 허망함을 일찍 깨달았다. 세상 부귀영화는 버리고 불굴의 신앙을 물려받은 김종한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태백산맥 깊은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산 설고, 물 선 타향, 그것도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오지에서 애긍에 힘쓰며 믿음을 지키던 김종한은 경상도에서 14명의 순교자를 낸 을해박해(1815년) 때 안동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로 끌려간 김종한은 1816년 음력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당하였다. 남편 김종한의 옥바라지를 위해 아내와 아들이 대구와 가까우면서 산이 둘러싸여 피란하기 좋은 신나무골 피막골(연화리 피정의 집 일대)에 일시 거처를 잡은 게, 신나무골에 천주교가 전해진 첫 계기라고 동네 사람들은 믿고 있다.

◈ 서상돈의 윗대도 기거하다

김종한은 국법으로 금하는 천주교를 무저항으로 지키려다 목이 떨어졌지만, 그 권력이 믿음마저 죽이지는 못하였다. 김종한과 그 가족의 유일한 무기인 믿음은 바람결을 타고 지역민들의 마음으로 날아들었다. 무엇이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던지게 할까? 김종한과 그 가족들이 보여준 삶은 척박한 토양을 바꾸었다. 김종한이 살던 우련전 교우촌 사람들과 참수형을 지켜본 대구 읍내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일시 거처하였던 신나무골에 천주교를 심었다.

신나무골에 두 번째로 신앙의 힘을 느끼게 한 이는 대구 혜성학교(효성학교의 전신) 설립자 김찬수(국채보상운동의 시조 서상돈의 조카)와 그 증조부 김현상이다. 문중 구전에 따르면 김현상은 원래 서울에 살았는데 '큰 난리(=박해)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상주를 거쳐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다. 때는 1837년으로 기해박해(1839년)가 터지기 2년 전이었다. 당시 김현상이 살던 집은 현재 신나무골 성지 명상의 집 뒤편, 엘리사벳의 집(예수성심시녀회 은퇴수녀들의 거처) 앞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해박해가 터지자 김현상은 한티로 숨었다가 대구 새방골(대구 죽전본당과 상리본당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김현상의 딸은 서상돈의 어머니로, 서상돈의 아버지가 죽자 친정으로 합류하면서 대구지역에 뿌리깊은 신앙가족이 뿌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 샤스땅 신부, 은신전교를 하다

대구대교구 이대길(욱수 성당 주임신부), 이용길(매일신문사 사장),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이무길 신부(월배성당) 3형제 신부와 안동교구 이성길(프란치스코), 서울교구 이효은 신부의 선대인 이시우 가정도 그 아버지(이종근) 때에 경신박해(1860년),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상주에서 신나무골로 옮겨와 칠곡 도당, 웃갓, 백운리 등으로 옮겨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이미 한국천주교회 초기사인 1700년대 중반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대길, 이용길, 이무길 신부 집안은 아버지 가계와 어머니 가계가 모두 순교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85년 김보록(초대 계산본당 주임) 신부가 신나무골을 은신전교의 근거지로 삼자, 매주일 신나무골로 와서 신앙을 이어갔다. 이들의 웃대가 살던 집은 아직도 신나무골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천에 살던 이문 가정은 문중박해를 피해 왜관으로 갔다가 1895년 가실본당 설립 때 크게 공헌을 하였다.

현재 대구천주교 첫 본당터로 성역화되어 있는 곳은 이이전의 집이었다. 이이전은 원래 달성군 부곡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부락민의 박해를 받아서 1862년 신나무골로 이사를 오면서, 신나무골은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신자들이 나무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조차 '신나무골'로 지어진 이곳은 조선교구가 창설(1831년)되고, 6년 만인 1837년 파리외방전교회 샤스땅 신부가 찾아온 유서깊은 곳이다. 그때는 사제들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지역을 맡아서 순회전교를 다녔는데, 한반도 남쪽을 맡은 샤스땅 신부가 맡아 신나무골에 머물면서 전교와 병자방문을 다녔다. 이후 샤스땅 신부가 기해박해(1839년) 때, 당고개에서 순교하자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가 뒤를 이어 신나무골을 방문하고 성사를 주었다.

◈ 1885년 대구본당 첫 사제 김보록 신부 정착

다블뤼 주교는 일기에서 그 지방(신나무골을 일컬음)은 매우 작고 의심을 받는 지역으로 20~30명밖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지만, 큰 읍내의 작은 핵심이 될 수 있기에 다행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큰 읍은 대구를 말한다. 대구는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병인박해(1866년) 등을 겪으면서 40여 명의 순교자가 신앙의 씨앗을 뿌린 복음의 텃밭으로 자라고 있었다. 계산성당 초대 주임사제였던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 다 저물어가던 시점이었다.

김 신부는 당시 블랑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서 "경상도 신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순회)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고는 다시 떠나가기 때문에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고, '1886년 4월에는 마침내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두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쓴 사제관이 바로 신나무골 성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원래는 신나무골 초기 신자인 이이전의 집이었다. 대구천주교회 첫 본당터이자 사제관인 이곳에 들어서면 과거 선교사들의 사진과 각종 유물 그리고 성물 등을 만날 수 있다. 신나무골 신자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방문객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다. 사제관 왼쪽 방에 들어서면 '죽어도 성교(聖敎)를 믿겠소.'라고 쓴 이선이 엘리사벳의 믿음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최근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언을 쓴 액자를 오른쪽 방으로 옮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 신나무골 연화서당은 신구학문과 복음의 요람

이엘리사벳 묘역과 함께 신나무골 성지의 양대축을 이루는 신나무골 대구천주교 첫 본당터는 김보록 신부 사제관, 명상의 집, 마당의 김보록 신부 흉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나무골에 있던 연화서당은 1920년 신동초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신, 구학문과 교리를 가르치던 배움과 복음전파의 전당이었다. 신나무골 연화서당은 김보록 신부가 세우던 당시 그 모습 그대로 흙집으로 복원되었으나 최근 수해와 폭우로 다시 훼손되어 무너져버려 안타깝다.

영남 교회 선교 요람인 신나무골 성지는 이곳에서 살다가 한티로 피란갔다가 한티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옮겨오면서 성지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었다.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역에는 제대와 기념비도 세워져있다.

◈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이엘리사벳은 작두에 목이 잘리는 끔직한 순교 이후, 순교자로서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농부의 아내였던 그녀는 죽음 앞에 신앙을 버린 남편과는 달리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처참히 죽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에 목을 누이고도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는 피맺힌 절규를 남긴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언은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 글씨로 보관되어 있다.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은 배정모는 통회 속에서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다가, 아내의 묘를 칠곡으로 옮겼었고, 다시 20여년전, 왜관 베네딕도수도원에서 신나무골 성지로 안장해주었다.

한창 여름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6월의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역을 키 큰 소나무들이 지키고 있다. 산기슭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묘역을 반원으로 둘러싸며, 십사처가 조성되어 있다. 생나무를 깎아 만든 14처를 돌며 십자가의 길을 하노라면, 어느 순간 불어온 실바람이 상큼한 솔내와 함께 그분의 향기를 전해준다. "그래,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모두 와서, 이곳에서 나와 함께 쉬자!" 는 깊은 울림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대구와 가까운 신나무골 성지에 서면 이 세상 혼돈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중요한 것을 챙기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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