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는 지난 3월부터 '청소년 동반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음주, 폭력, 가출, 약물, 인터넷 중독, 은둔형 외톨이 등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 상담 자체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을 직접 찾아가서 말 그대로 '동반자'가 돼 그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동반자는 청소년상담사, 청소년지도사, 사회복지사, 상담심리사, 임상심리사, 직업심리사 등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가들이다. 현재 100여명을 상담했거나 진행 중이고, 매일 7, 8건씩 신규 상담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방법을 몰라서 방치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에게 희망의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벽을 쌓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점점 사회를 미워하게 된 우리 아이들. 청소년 동반자들의 상담 사례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잦은 가출과 도벽 증상을 보이는 지훈이(가명)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지훈이는 수시로 가출을 반복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때까지 성적도 우수한 편이고 성격도 밝았는데 2학기 들어서면서 갑작스레 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게 돌아다니는 시간이 늘더니 급기야 며칠씩 가출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담배도 조금씩 피우게 됐다. 중학교에 들어와 상황은 악화됐다. 공부에 대한 흥미는 아예 없어졌고, 가출은 더욱 빈번해지고 폭력적인 모습도 보였다.
동반자가 찾아간 지훈이네 집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궁핍한 형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설겆이며 청소를 도와주는 가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부부 사이도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업상 술을 가끔 마시는 편이며, 아이들에게 다소 고압적이고 명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심각한 편은 아닌 듯이 보였다. 지훈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심도 기울이고, 아이가 더 이상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많은 걱정도 했다. 지훈이의 일탈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몇 차례 상담을 하면서 지훈이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감을 심어주자 믿기 힘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술을 마시고 돌아오면 폭력적으로 변해서 아이를 학대했다. 밤 늦도록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철사로 지훈이를 묶어두거나 마실 수 없게 된 더러운 물을 마시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가출한 지훈이를 데려와서는 버릇을 고치겠다며 며칠 씩 창고에 가둬두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 지훈이는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뛰쳐나왔고, 중학교를 자퇴한 동네 누나나 친구들과 함께 PC방과 노래방을 전전했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고 난 뒤 자아의식도 희박해졌다. 지훈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구석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동반자를 만난 뒤 지훈이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여전히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지훈이도 인정하고 있다.
◇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희주(가명)
처음 동반자가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상당히 거친 반응을 보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상담은 안하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희주는 학교 가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수업시간에 산만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간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울면서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바람을 쐬고 싶다며 친구와 함께 집을 나간 뒤 일주일 가량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다가 찜질방, PC방 등에서 잠을 자며 보냈다고 했다. 돈이 떨어져서 결국 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학교에 갈 생각은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희주는 외모 컴플렉스가 심한 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는데 중학교를 거치면서 사람들과 사귀는데 자신감을 잃게 됐다고 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여서 퍼머를 하고 화장과 서클렌즈도 하는 등 외모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뚱뚱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싫어지고 급기야 학교 가는 것도 꺼리게 됐다. 이런 속마음도 몰라주고 학교 가라고 등을 떠미는 가족이 싫어서 가출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도 모르고 답답한 나머지 대인기피증까지 생긴 상태. 용돈을 직접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지만 외모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용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한 적도 있지만 재미가 없다며 며칠 만에 포기하는 탓에 등록비만 날리기도 했다. 매사에 의욕도 없고 아무 것도 배우기 싫다고 말한다.
다행히 부모님이 동반자의 도움을 받아 희주의 상태를 이해하면서 상황은 좋아지고 있다. 죽어도 가기 싫다는 학교를 반드시 보낼 필요는 없다는데 공감을 하고, 조만간 자퇴서를 낼 계획이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한방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주 정도 지나면서 5kg 정도 감량에 성공했다. 몸무게가 줄어든 만큼 자신감은 커지고 있다. 현재 희주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도 직접 벌 생각이다. 부모님은 좀 더 일찍 희주의 고민을 알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 집에 돌아오지 않는 정현이(가명)
여중생 정현이는 지난 해 아버지 일 때문에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됐다. 수줍음이 많던 정현이는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한동안 친구를 사귀지 못해 애를 먹다가 몇 명의 새 친구를 만나게 됐다. 부모님들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엉뚱하게도 문제는 친구들로부터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몰려서 다니며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던 아이들과 만난게 된 것.
외롭던 정현이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렸다. 노래방, PC방 등을 다니며 집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용돈이 부족하다며 또래 친구들로부터 돈을 빼앗기도 했다. 시내에서 속칭 '삥'을 뜯다가 경찰에 적발된 적도 있었다. 술과 담배도 배웠고 인근 학교에 다니던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학교 후배들에게는 무서운 언니로 통하기 시작했다. 동반자가 학교로 찾아간 날, 정현이는 집단폭행 사건 때문에 교무실에서 벌을 받는 중이었다. 후배 여학생이 말을 함부로 한다는 이유로 때렸다는 것.
며칠 뒤 동반자가 다시 찾아갔을 때 정현이는 집을 나가고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무단 조퇴한 뒤 친구들과 함께 가출했다고 한다. 집에서 아무리 휴대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다만 인터넷 채팅사이트를 통해 쪽지를 남겨두면 '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답장만 남아있을 뿐. 얼마 전 학교를 그만 둔 남자 친구도 함께 가출했다가 돈이 떨어져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나간 지 보름 만에 정현이는 돌아왔다.
"나 좀 가만 내버려 둬." 정현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매사에 의욕도 없고, 친구나 오빠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갑작스레 환경이 바뀐 정현이는 외로움에 시달렸고, 부족한 애정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실망한 뒤 친구들에게 매달리게 된 것이다. 동반자를 만나 가출하는 '습관'은 버렸지만 아직도 방황은 계속되고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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