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마땅히 놀 거리가 없어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감자를 삶아먹다가 형들이랑 레슬링 한 판을 벌리기도 한다. 결국엔 늘 작은 놈이 울음보가 터져야 끝이 났지만 그래도 심심하긴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줄장대비가 내려 도무지 심심하기만한 한 나절. 잠시 햇볕이 쨍하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골목으로, 느티나무 동네어귀로 쏟아져 나온다. 본격적인 장마철 흙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너른 마당엔 빗물이 물길을 만들어 제법 시냇가도 생긴 듯 보이고 댐도 생긴 듯 보인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마당으로 모여들면 고무신을 벗어들고 대대적인(?) 건설 공사가 시작된다. 검정 고무신 하나가 덤프트럭도 되고 포크레인도 되었다. 만능 고무신인 검정 고무신이었다.
물길이 잘 흐르도록 길을 터주고 물길이 모인 곳에는 댐을 만든다. 마당 한 켠에 모래무지가 서너 삽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모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하이웨이를 내고 최신 공법을 이용한 손바닥으로 만든 두껍이 굴이 뚫렸다. 길이 나면 당연히 고무신으로 만든 도라꾸(덤프트럭)가 운행되었다.
아이들은 점점 신명이 들렸다. 진두지휘자 하나 없이 알아서, 그야말로 알아서들 한판 벌어졌던 조무래기들의 대공사였다. 일을 시키고 부리는 일 없이도 저절로 이루어졌던 그 시절처럼, 세상은 저렇게 알아서 스스로 돌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건 바로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될 때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햇볕나기도 잠시, 곧 부슬부슬 비가 내리면서 굵은 비가 쏟아지면 마루 끝에 앉아 대역사(大役事)의 공사 현장이 부질없이 무너지는 아픔을 지켜보곤 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열정과 허탈감이 교차되었다.
그 상실감을 메우기라도 하듯, 어둔 밤이 되면 도둑 괭이들처럼 하나둘씩 동네 어귀로 모여들었다. 벼르고 별렀던 수박서리는 장마철을 이용하는 게 제격이었다. 장마철이 되면 원두막의 할매, 할배들은 잠깐 감시망을 거두고 철수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제일 많은 정수형이랑 까까머리 중학생 두 명, 그리고 간 큰 초등생 너 댓 명이 작전 회의를 열었다. 오늘의 작전 회의는 누구 집의 수박을 서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덕수가 자기 집 수박서리를 하자고 제안을 넣었다.
서리의 원칙은 서리하는 구성원 모두가 자기네 과수밭이 있어야 참여가 가능했다. 즉, 서리 품앗이라고나 할까. 돌아가면서 자기네 밭의 수박을 서리했으니까 결국 제 집 것을 제가 서리하는 꼴이었다. 그래야 없던 용기도 생기고 나중에 들켜도 욕을 덜 먹기 때문이다.
하늘의 먹구름은 적당하고 달빛 한 점 없는 그믐날보다 더 좋은 날이었다. 수박서리는 절대 넝쿨을 밟지 않아야 했다. 준비해간 보자기에다 수박 꼭지를 비틀어 두어 개를 따서 넣고 도망치는데, 아무도 보는 이 없건만 다리가 왜 그리 후들거리며 넘어지고 자빠지는지... 한 녀석도 없이 느티나무로 모였다. 돌멩이로 수박을 쳐서 허겁지겁 먹던 그 맛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땐, 수박을 먹고 싶은 마음보단 도둑 괭이처럼 스릴 넘치는 잠입을 통한 성공이라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행히 서리도 체험을 해보는 시대가 되었다.
경북 봉화 청량산 비나리 마을 일대에서는 물고기잡기, 고추따기, 감자묻이와 같은 체험이 가능하다. 감자묻이는 봉화 지역의 민속으로 장작불을 피워 자갈을 달구고 그 자갈을 덮어 감자를 구워 먹는다.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던 어릴적 추억, 밭주인 몰래 옥수수를 서리해 가마솥에 한 가득 넣어 호호 불어 먹던 추억이 있다. 그런 추억을 느낄 수 있다. 저렴한 참가비에 옥수수 따기,옥수수 서리까지 가능하다.
http://binari.invil.org
김경호(아이눈체험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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