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온 대구 더위가 겨드랑이에 주룩주룩 흐르던 날이다. 햇살이 뜨거운 오후 3시. 대구 달서구 성당동을 헤맸다. 소위 가장 '잘 나간다'는 화가 이정웅(44)의 화실을 찾는 길이었다. 호당 70만 원을 호가하는 '붓' 작가. 국제 아트페어에 출품하기 무섭게 팔린다는 그다.
올 3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20호 작품이 4만 2천 달러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그래서 그의 화실은 그의 명성만큼 '거창'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골목을 헤매도 '이정웅'이란 이름은 고사하고, 화실이 있을 만한 건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2층 창에 'OO미술학원'이라고 쓰인 낡은 건물. 그 좁은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거기에 이정웅이 있었다. 20평 남짓한 화실. 거대한 붓 그림이 천장을 치받고, 몸 하나 겨우 돌릴 그 좁은 공간에 장발에 허우대 큰 그가 '점 찍혀' 있었다.
미술평론가 이진숙 씨는 "'귀신 같은 재주'로 사물을 재현하는 작가 이정웅"이라고 했다. 큰 캔버스에 먹을 잔뜩 먹인 붓을 척 찍어 놓은 그림들. 먹 번짐의 연탁(連濁)과 농담(濃談), 그걸 듬직하게 누르고 있는 한모(翰毛), 그리고 붓대. 이 씨의 말대로 확대경이라도 대보고 싶을 정도로 툭 튀어나와 잡힐 듯하다. 그는 '붓' 그림으로 아시아를 떠나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그는 동해의 '한 점'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 목수고, 할아버지는 배 목수였다. 자식 없는 집에 그의 어머니는 후실로 들어가 4남 1녀를 낳았고, 그는 그 집의 막내로 태어났다. 싸워 '조지고', 팔아 '조지고', 신세 '조진다'는 '육(六)조지'의 섬 울릉도. 당시 그의 집도 째지게 가난했다.
거기에 형제들이 모두 아파 형과 누나는 열아홉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도 죽을병에 걸렸다. "병원에서 그랬어요. 살코기와 쌀밥을 먹여라.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어느날 워낙 배가 고파 부엌을 뒤지다가 숭늉그릇을 발견했다.
그걸 벌컥벌컥 마셨다. 먹고 나니 비릿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빨랫비누 조각을 모아놓은 그릇이었다. "희한해요. 그걸 먹고 나서 씻은 듯이 나은 것 있죠. 그 이후로 아파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은 화가 지망생에게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다.
방위생활을 마치고 오징어 팔아 8만 원을 들고 울릉도를 빠져나왔다. 대구에 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3만 원이 남았다. "그 3만 원으로 이제까지 살고 있는 셈이죠." 선배 화실에 얹혀 살면서 라면 3개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다. "라면 하나를 네 조각을 내 물에 멀겋게 풀어 끓여 먹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하루는 100호짜리 그림을 가지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니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빈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버스 기둥에 얼굴을 대고 어지럼증을 참았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림을 놓지는 않았다. 서문시장 포목점에 가서 얻은 광목 조각을 가장자리에 이어 붙여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것이 대한민국 미술대전이었고, 그는 그해 특선을 했다.
그는 대구의 몇 안 되는 '전업작가'다. 그림 이외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없으면 굶고, 그림이 팔리면 입에 '풀칠'을 했다. 그림은 그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난 이외 또 하나의 상처가 있다면, 그건 색약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가 색을 판별하지 못하는 이상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천형'이었다. 대학 진학도 불가능했다.
"나는 대학도 못 가는데, 외국에 유학 갔다 온 친구가 거들먹거리면 사실 배알이 꼴렸습니다." 자격지심에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입학규정 때문에 번번이 낙방했지만, 그래도 원서를 안 내본 대학이 없을 정도다.
그러던 그가 2002년에 대학(계명대)에 입학했다. '색약 규정'이 풀렸기 때문. "시험을 치니까, 전교 차석이지 뭡니까." 4년간 등록금 공짜에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6개월마다 120만 원의 지원금도 나왔다. 뒤늦었지만, 그에게 잘 된 일인지 모른다. "입학하고 싶었을 때는 어차피 가난해서 등록금 낼 돈도 없었거든요."
그는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99%"라며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은 1%로도 안 된다."고 했다. 또 "색약이라고 색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상인보다 선명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글쎄요. 어릴 때 사주를 봤는데, 제 사주풀이 옆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붓하고 백지였어요." 그는 이를 운명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건 그의 미래고, 그의 꿈이고, 그의 전부다. 그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이다. 상처를 물어도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그냥…그랬지요…."라고 해 인터뷰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 절망은 그의 사전에는 없어 보였다.
지금도 하루 14시간씩 작업하면서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있다. 정말 '큰 획'을 그어보는 것이다. '붓 작업'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 어떤 작업이다. 그는 동양적인 추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서도 그는 여백을 꿈꾸고 있었다. 다 보여주지 않고도, 무한(無限)을 담은 그림의 선(禪) 세계일지 모른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63년 경북 울릉 출생. 중앙중, 배영고 졸업. 2006년 계명대 미술대학 서양학과 졸업. 1992, 1993,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신라미술대전 특선 2회. 살롱 도톤느 입선. 2003년 상하이 아트페어, 2004년 싱가포르 아트페어, 2007년 한국국제아트페어 출품. 20여 회 개인전.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 심상회,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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