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광주에서 열린 영호남 언론인 교류 포럼에 참석했을 때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새삼 떠올려본다. 오래전 충청남도 논산훈련소에서 흘러나왔다는 묘한 여운이 남는 우스갯소리였다.
'논산훈련소에는 전라도 장병 때문에 철조망이 설치됐고, 경상도 장병 때문에 취침점호가 생겼다. 충청도 장병 때문에 선착순이 생겼으며, 강원도 장병 때문에 부동자세라는 얼차려가 생겼고, 서울 장병 때문에 빳다(몽둥이)가 나왔다'는 것이다.
군대를 갔다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적잖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논산훈련소. 혈기왕성한 전국의 사나이들이 모여서 뒹구는 희비(喜悲)와 애환(哀歡)의 시공간이다 보니 지방색을 비유한 농담이 나왔을 법도 하다.
시쳇말로 '군대 이야기'라 여기고 그냥 흘려 넘길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마다의 지역색을 대변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전라도 장병 때문에 철조망을 설치했다는 것은 불합리한 관습과 조직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전라도 사람들의 자아의식이 담긴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가깝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일제강점기의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운동 등 역사적으로 많은 항쟁이 일어난 곳이 전라도가 아닌가.
충청도 장병 때문에 선착순이 생겼다는 말은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도 사람들의 '느림의 미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좋게 말하면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좀 나쁘게 말하면 행동이 굼뜨다는 뜻일 것이다. '형님 돌 내려가유….'란 이야기에서처럼 말씨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서울 장병 때문에 '빳다'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 팔도의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다 모여 살았던 한양, 즉 서울 사람들의 기질이 좀 반지랍다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서울 깍쟁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지난날 정치인들이 남긴 부끄러운 유산이 영호남 갈등이고 지역 갈등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치니 문제가 되는 것이지, 적당한 지역색은 오히려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그 말씨에서부터 고유의 맛이 담겨있다.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도 그 지방 특유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 다양한 맛과 멋을 서로 음미하고 아우를 때 한국문화는 그 품격과 보편성을 더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음식문화 하나만 보더라도 화합과 원융의 귀결이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갖가지 나물이며, 국을 끓이는 데 필요한 온갖 양념과 야채는 다양한 맛과 멋의 융합인 것이다. 판소리가 없는 한국의 음악, 하회탈춤이 없는 한국의 문화는 정말 싱거울 것 같다.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 사투리가 없는 한국은 생각만 해도 썰렁하다.
어찌 보면 서울도 하나의 지방이 아닌가. 한국의 문화란 그런 지방색의 발현이요, 지역문화의 결집이기도 한 것이다. 지역 문화를 도외시하는 소위 중앙이나 서울 시각의 한국문화란 '임자없는 명월'이요 '김 빠진 맥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최근 시절 인연이 닿아 본지 문화면에 연재했던 대구문단 일화 내용을 다듬어 '향촌동 소야곡'이란 단행본으로 엮었다. 비록 '낭만의 대구문단 일화'라는 부제를 달았고, 대구의 출판사에서 제작을 했지만, 당대의 유명 문인예술가들이 대구에 머물렀던 1950년대 피란문단 시절의 이야기는 한국문단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대구 향촌동에 드리워진 우리 문단의 애틋한 추억의 잔영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공감하고 싶은 욕심에서 서울의 유수 언론사와 통신사에 출판면 지면할애를 부탁하고 책도 보냈다. 그러나 며칠후 돌아온 답변은 너무도 민망한 것이었다. "책으로 소개할 만한 소재가 되지 않는다" "유명문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렇다면 오상순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구상 최정희 최태응 양명문 최인욱 김윤성 유주현 장덕조 유치환 이호우 김춘수 김동진 권태호 이중섭 등 당대의 문인문객들이 대구에 뿌려놓은 그 숱한 낭만의 일화들은 무엇인가?
서울로 돌아간 문인들이 명동과 퇴계로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리운 목소리로 떠올렸던 향촌동 시절, EBS에서 방영했던 '명동백작'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그 풍경들은 무엇인가. '향촌동 소야곡'이 아니라 '명동 소야곡'이었더라도 그런 반응이 나왔을까. 수도권의 작가가 쓰고 서울의 출판사에서 출간했더라도 그런 대답이 나왔을까….
조향래(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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