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89년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4연패를 이뤘다. 선동열(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버틴 해태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반면 삼성은 1986년과 87년, 해태와 가진 한국시리즈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서서히 하향 곡선을 걷고 있었다. 1988년 베테랑들의 부상과 함께 계속된 우승 실패로 그해 가을 그룹 감사까지 받은 삼성은 사령탑의 교체를 단행하고 또 한번 도약을 다짐했다.
이때부터 삼성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오로지 '해태 타도'였다. 아무도 꺾지 못하는 해태만 격파하면 그것이 곧 최고로 이어지는 수순이었기 때문.
그룹 감사 이후 88년 겨울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타격에 비해 확실한 투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바로 기둥 투수의 영입이었다. 84년 한국시리즈 4승에 빛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은 너무나 강력한 유혹이었고 그 결과 그해 11월 프로야구 사상 첫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김시진과 최동원의 맞교환.' 원래는 그것으로 트레이드는 끝이었다. 그러나 선수회 파동의 여파로 갈등을 겪던 롯데 김용철의 자청으로 뜻밖의 대형 트레이드가 또 한번 이루어졌다. 선동열에 가장 강한 선수라는 이유로 삼성은 결국 김용철과 장효조의 맞트레이드를 감행했고 허규옥, 오대석, 전용권, 장태수(투수)를 함께 보내고 이문한, 오명록, 김성현을 받으면서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89년 시즌이 시작되었지만 최동원은 합류하지 않았다. 후반기인 7월에 합류한 최동원은 훈련 부족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시즌 4위에 그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 돌핀스에 1승2패로 패하고 말았다. 막강 해태는 그 해에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를 4승1패로 꺾고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도 90년 시즌 삼성의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산악 훈련과 해병대 극기훈련의 초점도 오직 '해태 타도'에 있었다. 정동진 감독은 남몰래 호랑이 그림이 새겨진 방석을 깔고 앉을만큼 집념을 불살랐다.
리그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삼성은 빙그레를 2승으로 누르고 마침내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서 또 다시 해태와 맞붙게 됐다. 이 승부야말로 삼성의 지상 과제였던 만큼 벼르고 별렀던 터였다. 그래선지 김용국과 김용철의 분전으로 선동열에 1패를 안기면서 예상을 깨고 3승무패로 승리했다.
꿈에 그리던 설욕이었지만 그러나 정작 그것이 문제였다. 지상 최대의 목표를 달성한 뒤의 성취감이 선수들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린 것. '해태 격침'에 올인해 성준을 제외하고 투수력이 바닥난 이유도 있었지만 최강 해태도 이겼는데 LG 트윈스쯤이야 하는 방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LG에 4전 전패로 져 우승 만큼이나 의미있던 해태와의 설욕전도 빛이 바랬고 선임 감독들과 지역팬들의 한을 풀어준 정동진 감독은 옷을 벗었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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