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영화와 기다림

그야말로 '별이 빛나는 밤'에 첫 회분 콩트를 썼다. 동료 한 사람이 자기가 맡은 프로그램에 들어갈 콩트를 써 달라고 하면서부터 간간이 시나리오 습작까지 하게 되었다. 그 시작이 나를 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으니 그는 고마운 사람일까, 고난(?)의 고삐를 쥐어준 사람일까?

어린 시절에 본 만화경의 판타지로 비롯된 영화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을 지피게 해 준 사람, 느릿한 말씨에 한결같은 성실함을 가진 사람, 참 좋은 인연이다. 수많은 인연들이 시·공을 거치는 동안 다알리아 구근처럼 연이어지는 이 세상, 내가 맺은 인연들은 대부분 삶의 양태가 느린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면 아마 나는 답답할 정도가 아니면 다소 느린 듯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신뢰하는 경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영화 또한 느리고 디테일한 작품에 매력을 느끼면서부터 점차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갔다.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을 보면 시간이 비켜가거나 장소가 어긋나는 각각의 카테고리를 가진 인물들의 관계를 느린 호흡으로 엮어 놓았다. 매 신(scene)마다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보는 관조적인 카메라워크가 오히려 영화적 에너지를 상승시킨다.

느리면 느린 대로 완급 조절이 절묘하게 살아있는 영화, 그래서 '천국보다 낯선'은 답답하거나 지루한 영화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을 성찰하기에 좋은 명작으로 꼽히는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어슬렁거리는 이방인들이 등장하는 '천국보다 낯선'에서 새삼스레 '기다리는 사람'들의 비쥬얼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영화를 하다보면 기다림은 곧 천성이 되어버린다. 스태프 중 한 사람은 "지역에서 영화를 하려면 기다림은 필수, 인내는 기본이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래도 이루어지면 다행 아닌가? 영화하는 사람들은 '미련 곰탱이'가 되어야 한다. 물론 거대자본이 움직이는 충무로에서조차 그것은 마찬가지다. 무려 12년간에 걸쳐 제작된 국내영화도 있다.

시나리오 탈고를 한 지 3년 만에 크랭크 인을 하게 되었다. 주연 배우 또한 3년을 기다렸다. 나의 첫 상업영화 '굼벵이 왈츠'가 느림과 빠름의 대결구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시대와 함께 숨 가쁘게 흘러가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가끔은 '휴식'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을 그렸다.

그런 삶, 그런 이미지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청도에서 로케이션을 계획했다. 이제 느릿한 소걸음과 함께 수확의 절기를 기다리는 감나무 행렬이 카메라와 눈 맞출 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소연(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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