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신현정 作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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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서 하는 세수는 얼마나 호기로운가. 한 평 욕실에서 하는 여느 세수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겠다. 그래서일까, 시의 문면에 흐르고 있는 어조가 활달하기 짝이 없다.

눈만 뜨면 해야 하는 세수, 당연한 일을 하면서도 당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없었던가. 오늘 아침 이 세수가 마지막 세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내 몫으로 주어진 세수는 몇 번이나 남았을까 하는 생각.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하늘 저 켠'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날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일랑 잠시 접어두자. 어서 빨리 세수를 마치고 일터로 나가야지. 영원의 한 순간에서 피어오른 '보랏빛 나팔꽃 한 개'에 시선을 꽂아두고. 아득한 '하늘 저 켠'은 잠시 잊어버리고서.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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