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식처처럼 울타리 하나만 넘어서면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 품안으로 이끌던 베네딕도 수도원 왜관 본원은 지금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다. 2007년 부활을 앞둔 지난 성금요일(4월6일) 꼭두새벽(새벽 1시15분), 전기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마에 휩싸여 수도성지가 크게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성당을 'ㄷ'자 형으로 감싸고 있던 수도원 본관 건물 가운데 1958년에 지은 구관은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소되었다. 마를대로 마른 구관 목조건물에서 난 불은 대번에 3층, 2층, 1층으로 번져갔고, 거셀 대로 거세어진 불은 지붕을 타고 1962년에 지은 중관, 1984년에 지은 신관까지 넘나들었다. 중관과 신관 건물 옥상은 유물과 유품 보관소였는데,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2009년이면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사료가 전소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화마를 입기 전까지 봉쇄구역이던 구관은 온통 숯덩이로 변했는데, 그 와중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현장을 만났다. 바로 1층 오른쪽 방, 화기를 견디지 못해 축쳐진 천장과 시꺼멓게 타들어간 내벽에 하얗게 남아있는 십자가 형상이 바로 그것이다. 불이나 물, 세상 어떤 힘으로도 지울 수 없는 주님의 현존이 불탄 수도원, 고난의 현장을 지키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너희들이 넘어진 그 자리를 딛고, 다시 일어서라!"
◈ 지옥이 따로 없는 화재현장
12일로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본원이 화마를 당한 지 98일째. 분도(芬道)수도원을 찾아가는 마음은 복잡하였다. 하느님만 따르며, 순간의 게으름도 멀리한 채 기도와 노동으로 겸손하게 더불어 사는 수도원이 왜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화재로 참혹하게 바뀌었을 현장을 어떻게 보나 걱정이었다. 왜관 IC 우회전하여 직진길로 몇 분 달리지 않으니 금방 왜관 수도원에 다다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속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수도성지 왜관 분도수도원은 얼핏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았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 아름다운 구성당(성물 판매소), 단정하게 꾸며진 정원도 그대로였다. 얼마 전 최영수 대주교(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의 주례로 새 사제를 배출한 성당도 화재 흔적은 없었다. 큰불 아니었나? 성당 오른쪽으로 네댓칸 난 계단을 올라 외부인을 맞는 문간(응접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잠시 인영균 원장신부로부터 화재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불이 시작된 구관으로 향했다. 구관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살풍경한 장면이 화재의 끔찍함을 전해준다. 화마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무집에 시멘트 미장을 한 구관의 타다남은 건물 조각들을 딛고, 2층 3층 옥상까지 돌아보는데 무너질까 무서웠다. 그나마 피해를 덜 본 중관과 신관 건물도 시퍼런 천막을 뒤집어쓰고 있다. 중관과 신관은 목조 건물이 아니어서 건물 외관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 건물 옥상에 있던 유물을 전부 잃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지붕을 타고 화마가 넘나들었으니 외관은 멀쩡해도 비도 샌다. 리모델링을 해야 겨우 쓸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교회 소중한 자료 소실
왜관 수도원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1958년 지어졌던 수도원 구관이 전소됐고, 신관 옥상과 지붕, 참사회의실도 불에 타 재만 남았다. 참사회의실은 구 수도원 성당건물이라 바깥사람들은 성당이 불타는 줄 알고 크게 놀랐다. 건물피해도 컸지만 수도원 100년 역사가 잿더미에 파묻히는 아픔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이다. 선배 수도자들의 유물과 유품, 서적, 사진, 100주년 자료들이 모두 타버려 한국교회로서도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었다. 최근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반환받아 이곳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겸재 정선의 화첩은 문서고 철문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가 제일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다른 중요 문서들도 일부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몇몇 수도자들은 불이 성당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관 출입문 쪽에서 소방 호스를 잡고 불과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현 성당으로 불길이 넘어오는 것은 막았다. 대부분 형제들은 불을 끄느라 수도복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숙소가 불타는 바람에 형제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곳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노인 수사들은 수도원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무의탁 양로시설인 '분도 노인마을'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평생 왜관 수도원에 머물며 하느님을 섬기고 산 노인 수사들은 두말하지 않고 양로원으로 옮겨갔다. 올해로 아흔이 된 김 필립보 수사는 양로원에 간 다음날 대퇴부를 크게 다쳤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화장실에 가다가 발을 헛디뎌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젊은 수도자들은 외부 손님들이 묵던 곳으로 옮겨갔다. 안타까운 사연이 어디 이뿐일까?
◈ 수도자만을 위한 곳 아니다
현재 왜관 수도원에 사는 형제들은 70명. 베네딕도회 총인원 140여 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왜관 본원에서 산다. 그렇지만 왜관 수도원이 단순히 수도승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혼잡하고 물질에 찌든 세상 사람들이 빛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성지이다. 한 곳에 모여 더불어 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위해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승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증거하는 낮은 삶을 산다. 개인 소유라고는 하나도 없다. 유산을 포기하고 사유재산을 반납하고 수도원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평생 가난이 몸에 배어 있으며, 한시도 놀지 않고 일을 한다. 기도가 그 중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보다 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 성부 오른편에 앉은 예수님을 따르는 21세기 수도자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순교 여정을 담담히 걸어가고 있다.
◈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 때
왜관 수도원의 평일 기상시간은 새벽 5시, 끝기도 시간은 오후 8시이다. 끝기도 후에는 대침묵에 젖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하루 다섯 차례 성당에 모여 공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오전 오후에는 맡겨진 소임에 따라 일을 한다. 화마가 휩쓴 잔해들을 거둬내는 것도 수도자들의 몫이고, 수도원 안팎을 거울알처럼 깨끗하게 가꾸거나 각 본당에서 쓸 색유리화를 만드는 것도 소임 가운데 하나이다. 한땀 한땀 수도자들이 입을 옷을 깁기도 하고, 농사를 맡은 신부도 있다. 신자들의 영성에 도움이 될만한 책이나 비디오를 만들고, 성화를 그리거나 이콘을 만들고 베네딕도의 벗들을 포함한 교우들의 영적 지도도 맡는다. 무슨 일을 맡겨도 감사하게 받아들여 기도하고 일하며, 게으름은 경계한다. 그만큼 베네딕도회 수도규칙은 엄격하다. 개혁을 이뤄낸 베네딕도회를 보며 신자들은 많은 위로를 받고, 주님의 여정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일상에 파묻혀 살지만, 이곳 수도승들을 보면 주님은 확실히 계심을 느낀다. 그렇기에 왜관 수도원은 단순히 수도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신자 모두를 위한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왜관 수도원의 복구는 분초를 다툰다. 소리내어 도와달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곤경에 처한 베네딕도 수도원을 위해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 때이다.
◈ 선교 100돌 국제행사 코앞
잿더미에서 나뒹굴던 수많은 선풍기 잔해들은 왜관 수도원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에어컨은커녕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는 곳도 많았다. 숙소라고 해봐야 겨우 몸을 누일 수 있을 정도로 검박했음이 화재 현장을 돌아본 후의 판단이다. 이렇게 낡고, 오래된 수도원에서 당신의 아들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게 보기 가여웠을까? 주님께서 주시고, 주님이 거둬가는 뜻을 알 수야 없지만, 더 깊은 속내가 숨어있지 않나 싶다. 수도원 본관은 원형 복구가 불가능하지만, 왜관 수도원 형제들은 전보다 더한 상호신뢰와 유대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주님의 영에 충실한 수도승들이 있는 한 언젠가 왜관 수도원은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일어서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오는 2009년이면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본원은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 전세계 오틸리아 연합회 총재들이 참석하는 평의회를 포함한 각종 국제 행사를 치러야 한다. 왜관의 이름을 세계 가톨릭계에 떨칠 기회이지만, 일반인은 잘 모른다. 왜관 수도원의 역사는 전란기인 1952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기원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뮈텔 주교가 초청한 베네딕도회는 서울수도원(1909~1927),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1927~1949) 등을 거쳐 왜관 수도원(1952~) 시절을 열고 있다. 오는 2009년이면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한국전쟁 시기 공산당으로부터 수많은 수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였고, 베네딕토회는 이들의 시복시성을 준비하고 있다. 피란시절, 대구교구청에 머물기도 한, 베네딕도회는 전후인 1952년부터 왜관에 수도성지를 열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회 정신에 따라 하느님 나라 증거에 모든 힘을 다 쏟으며 한국교회 발전에도 큰 일익을 담당해온 왜관 수도원이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는 독일과 스위스 등지 은인들의 정성이 컸지만 이제 우리 힘으로도 충분하다. 얼마 전 명동성당에서 수도원 복구를 위한 음악회도 열렸듯이, 이제 한국 신자들의 활발한 나눔실천으로 왜관수도원(054-972-2000)이 하루빨리 성지의 모습을 되찾게 되기를 바란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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