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쌀쌀한 봄날이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쯤 돼 보이는 여학생이 복싱체육관(대한복싱·대구시 동구 신암동)으로 들어섰다. 옆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부부며, 함께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취미생활도 즐기고, 건강도 챙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앳돼 보이는 여자는 스물 두 살이라고 했다. 여자는 키 1m 67cm에 몸무게는 47kg으로 마르고 약한 편이었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나면 누워 쉬어야 할 만큼 몸이 허약하다고 했다.
허약했지만 하루 이틀이 가고, 한달 두달이 가도 여자는 결석하지 않았다.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투지였다. 함께 복싱을 시작했던 남편은 두 달이 지나자 그만두었다. 회사 일이 바빠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했다.
여자는 혼자 체육관엘 다녔다. 한달, 두 달, 여섯 달, 일년이 지나도록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일년 육 개월이 지날 때까지 체육관이 쉬는 일요일을 빼면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
주부 복서로 세계 챔피언이 된 이화원(26)이다. 남녀 통틀어 대구·경북 소재 체육관 소속 최초 세계 챔피언. 그녀는 2003년 봄 복싱을 시작했고, 2004년 8월 7일 프로선수로 등록했다. 2005년 1월, 한국 여자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고, 2007년 4월 30일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페더급 챔피언이 됐다. 세계 챔피언 그녀는 대구에 살고 있고, 동구 신암동의 복싱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세계 챔피언은 모자를 눌러쓰고, 카키색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체육관에 나타났다. 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말괄량이 아가씨 같았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가 씩씩했지만 곱살한 외모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양이 친절해 보였다. 챔피언의 주먹은 무척 작았고 굳은살이 없었다. 저 얼굴로 복싱을 할까 싶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날렵해 보이기는 했지만 남자 선수들처럼 근육이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오르자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꽉 다문 입술, 굳은 얼굴에는 빈틈이 없었다. 미트를 치고, 샌드백과 스피드 백을 치는 뒷모습은 영락없는 남자였다. 평범한 아가씨 팔처럼 보였지만 주먹을 뻗고 거두는 속도는 놀라웠다. 빠른 주먹이 제 맘대로 날뛰는 스피드백을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부위에 적중했다. 예전의 여성 복서들이 보여주었던 '허우적거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빠른 선수죠. 국내 여자 선수 중에는 가장 빠를 겁니다."
김요동 관장(대한복싱 체육관)은 이화원 선수의 장점을 빠른 스피드와 지구력이라고 했다. 특히 전광석화 같은 원투는 눈으로 좇기도 힘들었다. 챔피언의 스파링 파트너는 언제나 남자들이다. 그녀는 자신과 10kg 이상 몸무게가 차이나는 남자 선수들과 맞붙는다. 복싱을 2년쯤 배운 20대 남자와 경기를 펼치면 3회전을 넘어가면서 이화원 선수가 우세를 보인다고 했다. 좀처럼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시종일과 빠른 주먹을 던지기 때문이다. 국제심판 신경하씨도 이화원 선수를 두고 '한국 여자 복서 중 테크닉과 디펜스가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성이 복싱을 배웠다고 해서 남성과 싸움에서 이기기는 무척 어렵다. 세계 챔피언이라고 할지라도 장담할 수는 없다. 이화원 선수는 복싱과 싸움은 다르다고 했다.
"주먹만 가지고 싸운다면 웬만한 남자들한테 이길 수 있겠죠. 그러나 링밖에서의 싸움은 변수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링 밖에서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고요."
이 화원 선수는 링 안에서도 남성과 대결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한방 한방이 다르다는 것이다. 남성과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맞대결보다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한다. 그런 만큼 훨씬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이 선수는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여고시절 밴드부에서 악기를 다뤘고, 취미라고는 사진촬영이 전부였다. 친정 집안에도 격투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복싱을 시작하면서도 '챔피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남편과 함께 취미와 건강을 다질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복싱을 시작했을 뿐이다. 타고난 재능이야 있었을 것이다. 결석 한번 하지 않을 만큼 노력파라고 했지만 노력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를 수는 없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누구나 99%의 노력을 강조하지만, 1%의 재능을 보태야 한다. 더불어 복싱은 적게 맞아야 하지만, 맞는 것을 두려해서도 안 된다. 세계 챔피언 이화원 선수도 경기를 마친 직후 찍은 사진에는 붉고 퍼런 멍이 있었다. 김 관장은 "이화원 선수는 몇 대 맞았다고 주눅들거나 물러서지 않습니다. 맞은 티를 내지 않으니 상대가 오히려 힘겨워 하죠."라고 했다.
복싱 입문 초창기에는 근육통과 빈혈을 앓기도 했다. 그러나 서서히 회복됐고 이제는 몸도 마음도 훨씬 건강해졌다. 다소 내성적이던 성격도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매사에 자신감이 생겼다.
체력관리를 위해서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지만 챔피언 이화원은 음식을 가리는 편이다. 야채와 생선위주로 먹고, 육류는 일주일에 한번쯤 섭취한다. 10 라운드를 부지런히 뛰기 위한 최소한의 섭취인 셈이다.
이화원 선수의 원래 체급은 슈퍼 플라이급(52kg 160이하). 그러나 좀처럼 도전기회를 잡지 못해 자신의 체급보다 세 체급은 높은 페더급(57kg 150이하)에 도전, 케냐의 주디 와쿠티 선수를 물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이 선수는 자신의 몸에 가장 적합한 슈퍼 플라이급 도전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올해 안으로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복싱이 여성에게는 너무 과격한 운동이 아닌가?'
이화원 선수는 여성에게 복싱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시종일과 뛰면서 주먹을 내지르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 몸매 관리에도 좋다고 했다. 특히 샌드백을 치고, 상대와 맞붙는 종목이기 때문에 지겹지 않다고 했다.
이화원 선수가 복싱을 시작하고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챔피언 벨트가 아니라 건강이다.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는 몸이 무척 약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쉽게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복싱을 시작하고, 프로로 입문하면서 매일 오전 10km를 거뜬하게 뛰고 오후에는 매일 체육관에 나와 기술훈련까지 한다. 경기를 한달 남짓 앞둔 시점부터 운동량은 급속히 늘어난다. 오전에 2시간 이상 달리기를 하고, 오후에는 4시간 가량 비지땀을 쏟는다. 한티재를 넘어 달리기도 한다. 저녁 설거지를 힘겨워하던 그녀가 산을 뛰어서 넘는 챔피언이 된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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